TV 속이 현실인가, 내 삶이 드라마인가

김지혜 기자 2020. 3. 2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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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등장인물·극 속 세계가 내 진짜 일부가 되는 과몰입

SBS 드라마 <하이에나> 주인공 정금자의 인스타그램 계정. SBS 제공·인스타그램 캡처

회사원 임수빈씨(31)는 최근 변호사 정금자의 인스타그램 계정(@junggumza)을 들여다보는 데 재미를 붙였다. “現) 송앤김 파트너 변호사 前) 법률사무소 충 대표변호사.” 프로필에 적혀 있는 대로 한국 최고의 로펌이라 불리는 송앤김의 파트너 변호사인 정금자는 자신의 일상과 동료 변호사들 모습을 특유의 강단 있으면서도 구수한 코멘트와 함께 올리는 것을 즐긴다. 임씨를 포함해 9만5000여명(29일 기준)의 팔로어가 정금자의 인스타그램을 구독하며 소식을 기다린다.

‘하이에나’주연 김혜수

정금자 인스타 계정 운영

애청자들 구독·댓글도

매일같이 계정을 드나들지만 임씨는 정금자와 아무런 친분이 없다. 정금자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SBS 금토드라마 <하이에나> 주인공이다. 정금자를 연기하는 배우 김혜수가 <하이에나> 방영 직전부터 정금자의 계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이에나> 관계자에 따르면 김혜수가 손수 사진을 고르고 글을 쓴다. 직접 댓글도 단다. 애청자들은 김혜수의 존재감을 경유해, 현실로 훅 튀어나온 가상의 인물 정금자에 열광한다. 임씨는 말했다. “본체(배우)까지 이렇게 푹 빠져버렸는데, 제가 어떻게 ‘과몰입’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과몰입’. 최근 드라마 관련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드나들어본 이들에게 익숙한 말이다.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거나 빠짐.” 과몰입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요새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뜻은 좀 더 구체적이다. 드라마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드라마 속 세계와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놀이문화를 일컫는다. 넷플릭스나 웨이브 같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드라마를 ‘몰아보는’ 시청 습관이 자리 잡고, 드라마 내용을 보다 심층적으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시청자들이 늘어나면서 생긴 콘텐츠 소비 방식이다.

지난 2월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스토브리그>는 TV드라마계에 ‘과몰입’이란 용어를 정착시킨 계기가 됐다. ‘야구 다큐멘터리’로 불릴 만큼 뛰어난 리얼리티와 구체적인 설정에 몰입한 시청자들은 <스토브리그> 속 드림즈나 바이킹즈 등 구단들이 꼭 실재하는 것처럼 전력을 분석하고 굿즈를 사들였다. 배우들은 본명을 잃고 ‘백승수’니 ‘강두기’니 하는 극중 배역으로만 불렸다.

현실과 드라마를 이어주는 고리가 되는 배우는 과몰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중 인물의 ‘본체’라 불리는 배우들이 과몰입에 적극적으로 가세할 때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급격하게 흐려진다.

김혜수가 정금자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듯, 배우 남궁민은 백승수의 정체성으로 스포츠 매체와 인터뷰에 나선 바 있다. 드라마 종영후에도 과몰입은 가능하다. 지난 17일 SBS 아침드라마 <맛 좀 보실래요?>에 <스토브리그> 바이킹즈 선수들이 출연하더니, 19일 KBS 2TV <해피투게더4>에는 배우 하도권이 강두기 이름 석 자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 환영을 받았다.

리얼리티 높은 스토브리그

‘좀비’ 가상현실 다룬 킹덤 등

팬들 ‘몰입’의 새 트렌드로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제작진이 운영한 ‘단밤포차’ 홍보용 인스타그램 계정,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에서 의녀 서비 역을 맡은 배우 배두나 인스타그램 계정. 인스타그램 캡처

리얼리티가 특출난 드라마만 과몰입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가 배경인, 그것도 좀비가 날뛰는 가상현실을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의 배우들도 최근 시즌2 공개 직후 과몰입에 가세해 팬들의 호응을 얻었다. <킹덤>에서 의녀를 연기한 배우 배두나는 최근 극중 주요 소품인 ‘생사초’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며 “My precious(내 보물)”란 글을 올렸다. 그러자 영의정을 연기한 배우 류승룡이 “공구(공동구매)해요!”란 댓글을 달았고, 중전을 연기한 배우 김혜준은 한술 더 떴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중궁전 부재 시 집 앞에 놓아주세요!”

드라마 속 공간이나 사물이 과몰입 촉진 기제가 되기도 한다. 21일 종영한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제작진은 주인공 박새로이(박서준)가 운영하는 ‘단밤포차’가 실재하는 것처럼 홍보용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했다. 작가 광진이 운영하는 ‘꿀밤포차’의 존재까지 알려지며 박새로이의 ‘단밤포차’가 이태원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실감이 애청자들을 사로잡았다. tvN 목요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팬들은 극중 율제병원 의사들의 의료원증을 ‘자체 굿즈’로 제작해 소비하고 있다. 의료원증은 가상공간에 불과했던 율제병원을 현실로 끌어올리는 ‘비장의 카드’가 된다.

드라마 과몰입 유행 배경에는 시청자들의 변화가 있다. 회사원 김은영씨(28)는 “예전엔 그저 시간 때우기용으로 드라마를 봤다면, 요새는 파고들 요소가 있는 작품을 골라 집중적으로 본다”면서 “과몰입은 드라마가 보여준 장면 외의 내용을 상상하고 해석해보는 감상법”이라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몰입 유행은 OTT 등으로 ‘몰아보는’ 시청 습관과 최근 제작된 드라마들의 성격 변화와 관계돼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시청자들이 이전보다 긴 호흡으로 드라마를 감상하게 되면서 ‘몰입’에 대한 수요가 한층 더 커진 가운데 <스토브리그>처럼 리얼리티가 뛰어나거나 <하이에나> <이태원 클라쓰>처럼 극적 구성을 갖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이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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