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 임재범과 옥주현, 결국 '뽕끼'의 수준차

신동립 입력 2011. 6. 12. 06:54 수정 2011. 6. 12.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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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문원의 문화비평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를 둘러싸고 이슈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 '나가수 현상'이란 단어도 낯설지 않다. 그러면서 이슈생성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근래 발의된 '립싱크 금지법'까지도 이 같은 '나가수 현상'에 기댄 측면이 없지 않다. 이 '나가수 현상'을 둘러싸고, '나가수'의 본질적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이 비평이 등장했다.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가 주간경향에 기고한 칼럼 '[특집]노래만 남고 음악은 빠진 '나가수' 신드롬'이다.

칼럼은 "사실 아무리 좋게 봐도 < 나는 가수다 > 의 한계는 명백하다. 대중음악의 복잡한 산업구조와 맥락을 단지 노래하는 기술로 치환시킨 다음 거기에 순위를 매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나는 가수다 > 가 일종의 '기능 올림픽'에 불과하다는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의 비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면서 "그는 이런 현상이 가수만 부각시키는 '가요계의 보수적인 관습'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 사회에 이미 오랫동안 체화된 구조라는 점을 지적한다. 동의한다. 그러므로 < 나는 가수다 > 가 실제로 음원 판매나 공연을 통해 음악시장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긍정적으로만 볼 수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노래 부르는 능력이란 뜻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이다)는 외국어로 변경되지 않는, 한국에서만 그 의미가 통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보편성이 없는 불투명한 개념이 노래(와 음악)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셈인데, 그로 인한 혼돈은 현재 < 나는 가수다 > 에 출연하는, 출연할 예정인 가수들을 에워싼 소모적이면서도 파괴적인 논쟁과 논란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라며 "냉정하게 말해, < 나는 가수다 > 는 가창력을 볼모로 대중음악에 서열을 매기고 장르를 차별화하는 폭력적인 경쟁구조를 정당화한다. 이런 구조라면 제 아무리 음악시장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고 해도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위 칼럼은 '나가수'를 프로그램 내적논리로서 비판한, 지금껏 등장했던 중 가장 원론적인 비평으로 볼 수 있다. 애초 '나가수'는 동의하기 힘든 기준을 동원해 대중음악 본질을 제멋대로 재단해버린 프로그램, 오히려 대중 편견만을 부채질한 프로그램이란 것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내용 중 '가창력'에 대한 설명만큼은 좀 더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칼럼은 '가창력'에 대해 "보편성이 없는 불투명한 개념"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물론 액면 그대로는 그렇다. '가창력'은 결국 가수에 '노래를 잘 한다'는 평가를 내릴 때 그 근거가 되는 능력, 자질, 테크닉 등을 총합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문제는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리고 음악관에 따라 그 '잘 하는 노래'의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가창력'은 보편성을 얻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게 칼럼의 논거다.

그러나 상황을 좀 더 좁혀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가창력'이란 단어는 이미 대중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그것도 막무가내로 쓰이는 것도 아니다. 잘 보다보면 용어를 사용할 때 어느 정도 일관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대중적 동의도 쉽게 얻어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걸까. 따져보면 쉽다. '가창력'은 현 시점 한국이라는 문화권의 주류 음악정서에 기댄 용어로 정의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가창력 있다'고 평가되는 가수의 창법, 또는 가창방향성과 여타 문화권에서 그런 식으로 평가되는 가수의 그것이 서로 같을 리 없다. '가창력'은 그런 식으로, 즉 동일 문화권 내에서의 주류정서를 바탕으로 철저히 국지적인 보편성을 얻어낸 단어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문화권의 주류 음악정서란 대체 뭘까. 어떤 특정정서가 있기에, 그리고 얼마나 그 정서가 확고부동하기에 그를 잘 소화해내는 능력에 단어까지 정립될 수 있었던 걸까. 차근히 살펴보기로 하자. 일단 위 칼럼 검토부터다.

칼럼은 '가창력'에 대해 "외국어로 변경되지 않는, 한국에서만 그 의미가 통하는 단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기술은 아니다. '가창력'은 사실 일본, 중국 등 대표적 한자문화권에선 똑같이들 사용하는 용어다. 한편 '가창력'에 해당하는 표현은 영어문화권에도 존재한다. '가창능력'의 준말로 봤을 때 직역대로 'singing ability'라는 표현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자문화권의 '가창력'과 영어문화권의 'singing ability'는 그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singing ability'는 대개 노래의 테크닉을 가리킨다. 성량 부분까지 포괄하는 표현은 아니다. 성량은 'voice'라는 단어를 통해 따로 묘사한다. 'weak voice' 'powerful voice' 같은 식이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의 '가창력'은 한중일 동일하게 성량까지도 포함한 용어다. 그 용례를 한중일 모두에서 찾아봤을 때 이 같은 경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가창력(歌唱力)' 항목의 한자사전을 찾아봐도 그 뜻은 "노래를 잘 부르는 능력. 흔히, 성량이 풍부하고 음감이 뛰어난 경우에 쓰는 말임"이라고 나와 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앞선 논리에 따르자면, 각 문화권 주류음악 형태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어찌됐건 '가창력'이 보편성을 얻으려면 해당 문화권 주류 음악정서를 잘 소화한다는 의미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자문화권의 주류 음악정서는 '성량'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형태라 규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중일, 한자문화권의 주류 음악정서, '성량'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음악형태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온다. 세칭 '뽕끼'라 부르는 특성이다.

'뽕끼'는 비록 비속어긴 해도 포털사이트 지식백과에까지 게재돼있는 단어다. 지식백과는 '뽕끼'를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특성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대개 익숙한 멜로디, 특유의 리듬 패턴, 애상과 비탄이 가득한 음색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특징은 트로트풍의 대중음악에서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뽕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트로트풍의 대중음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과 일본은 바로 이 '뽕끼'를 주류 음악정서로서 정확히 공유하고 있는 문화권이다. 이를 두고 일본 엔카가 한국 트로트의 효시니, 애초 조선민요가 엔카 정립에 영향을 줬느니 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 '뽕끼'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급기야는 중국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트로트나 엔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뽕끼'를 각종 장르에 주입한 한국과 일본의 현대 대중음악을 받아들인 탓이다. 요샌 중국 대중음악도, 적어도 '뽕끼'라는 차원에선, 한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이 '뽕끼'를 살리기 위해선 일정수준 이상의 성량이 반드시 필요하다. 애초 '뽕끼'의 근원이 됐던 트로트, 엔카도 단련된 목청이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언급했듯 '뽕끼'가 트로트 영역을 벗어나 속성상 스며들기 쉬운 서구 음악장르, R & B나 록 발라드 등에 주입되면서 성량의 문제는 더더욱 중요해졌다. 서구 이종(異種) 장르 내에서 '뽕끼'를 절절히 소화해내려면 울부짖는 괴성, 흐느끼는 가성, 바르르 떠는 소몰이 바이브레이션, 다양한 강약과 리듬의 선 굵은 꺾기 등 성량을 토대로 한 조건과 테크닉이 필수불가결 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중일 한자문화권이 말하는 '가창력'은 곧 성량을 포괄하는 의미로 발전된 것이고, 결국 한국에서 '가창력 있는 가수'란 바로 이 '뽕끼'를 잘 소화해내는 가수, '가창력 떨어지는 가수'는 '뽕끼'를 맛깔나게 소화해내지 못하는 가수를 가리키게 됐다는 얘기다.

이 같은 분석은 '가창력 있는 가수'들만 모아놨다는 '나가수' 현장에서도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나가수'에 등장해 '가창력'을 평가받은 가수들은 절대다수가 이 '뽕끼'를 가장 잘 구사하는 이들이다. 흑인 음악을 하건 록 음악을 하건 대부분 '뽕끼'를 바탕으로 각 장르를 '한국화'시켜 대중에 선보였던 이들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뽕끼 배제'를 모토처럼 내세우며 등장했던 모던 록 싱어, 네오펑크 싱어, 일렉트로니카 싱어 등은 '나가수'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래도 " < 나는 가수다 > 는 가창력을 볼모로 대중음악에 서열을 매기고 장르를 차별화하는 폭력적인 경쟁구조를 정당화한다"는 차우진 평론가의 결론은 여전히 반박이 불가능한 정확한 지적이다. 다만 그 서열의 문제에 있어 '뽕끼를 잘 살리는 가수'란 공통적 기준이 적용되고 있음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결국 '나는 가수다'는 '나는 뽕끼를 잘 살리는 가수다'가 더 정확한 타이틀이라는 것.

그런데 여기서 '뽕끼'의 문제를 한 번 더 살펴볼 필요도 있다. 확실히 한국 트로트와 일본 엔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긴 해도, 창법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엔카는 작은 기교들을 다채롭게 사용하며 전반적으로 간드러지는 창법을 구사한다. 이 같은 특성이 제이팝 전반에도 배어있다. 그러나 트로트는 엔카보다 훨씬 처연하며 절절한 창법을 구사한다. 작은 기교들보다 선 굵은 음정전환을 선호한다. 이런 경향이 케이팝에도 상당부분 녹아내려 있다. 시인 함성호는 "신파와 청승, 그런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걸 뽕끼"라고 규정한 바 있다. 확실히 한국 트로트는 일본 엔카보다 더 신파적이고 더 청승맞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트로트에 배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恨)'의 정서다.

한(恨)은 영어로 흔히 'sorrow'라 표기되곤 한다. 그러나 한(恨)은 'sorrow'가 뜻하는 '슬픔'과는 그 의미 면에서 꽤 차이가 크다. 사전적으로는 '원통하다' '원망스럽다' '미워하다' '억울하다' 등이 한(恨)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 원통하고 원망스럽고 밉고 억울한 감정이 일게 된 원인 격 감정은 또 따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들이 모두 '서러움'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 감정들이라 해석하고 있다.

'서러움'은 내적으로 그냥 생성되는 감정이 아니다. 항상 '서러움'을 일으키게 한 객체를 필요로 한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일어나는 감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느껴지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란, 그저 그 자체로 슬픈 게 아니다. 서럽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는데 나만 겪고 있는 것 같아 서럽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아 서럽다. 본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민족정서다. 한국인의 평등의식이 유난히 강한 것도 그 탓이다. 그리고 이런 독특한 정서가 민족적으로 배어있기에 같은 애상과 비탄의 코드를 짊어진 '뽕끼'더라도 한국 트로트는 일본 엔카보다 더 처절해지고 더 사무치는 감정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근래 '나가수' 최대이슈로 부상한 옥주현 반대여론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애초 대중이 옥주현 출연반대를 외친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마이너리티 감수성의 문제도 있었고, 아이돌 전력 탓에 일종의 저급상품으로서 소비인식이 잡혀있던 상품이 뜬금없이 고급상품처럼 둔갑한데 따른 혼란과 분노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옥주현이 '천일동안'을 피로해 '나가수' 해당 회차 1위를 차지한 이후에도 상당수 대중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목청만 좋을 뿐 여타 출연가수들, 예컨대 임재범 등이 보여줬던 절절함과 비장함에는 현격히 못 미쳤다는 것. 그러면서 '연륜의 차이'에 대한 문제도 꾸준히 거론됐다. 만약 이 같은 평가가 단순 안티분위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진솔한 입장이었다면, 이는 분명 더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일단 절절함과 비장미 등에 대해서라면, 단순화시켜 생각해볼 때, 그저 '뽕끼'를 내는 테크닉이 옥주현에 부족했다는 식으로 풀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연륜'의 문제는 대체 왜 거론되고 있는 걸까. 물론 그조차도 나이 먹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에 점수를 주는 대중의 마이너리티 감수성 차원으로 해석될 순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을 일률화 시키기보다는, '뽕끼' 묘사에 있어 '연륜'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는 게 더 적절하다.

먼저 '뽕끼'에도 나름 '깊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해 보자. 그 깊이는 단순 성량과 테크닉 차원에서 가늠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한국적 '뽕끼'의 근간이 되는 '서러움'의 감정이 어느 만큼 가수에 배어있나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옥주현에도 갖가지 개인사가 있을 수 있고, 그를 통해 '서러움'의 감정도 겪어봤을 수 있다. 그러나 '서러움'이란 '환희' '분노' '경악' '고통'처럼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아니다. '서러움'은, 누적되는 감정이다. 누적되면서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큰 덩어리로 뭉그러지는 감정에 가깝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아무리 큰 고통과 억울함을 겪었더라도, 적어도 '서러움'이란 측면에서는, 나이가 몇 살이라도 더 많고 그만큼 인생경험이 많은 쪽이 더 풍부하고 압도적인 감정을 표출해낼 수 있게 된다. '뽕끼=서러움=연륜'이라는 공식이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오점 없이 정확하고 정교하게 '뽕끼'를 구사한 옥주현 쪽보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정도 불안정하지만 폭발적으로 '서러움'의 감정을 토해낸 임재범 쪽을 대중이 더 절절하고 비장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된다. 옥주현에겐 아직 '뽕끼'를 실감나게 구사할 수 있는 조건, '연륜'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뽕끼'를 중심으로 한 접근법으로는 그간 풀리지 않았던 '옥주현 미스터리'도 보다 명쾌하게 해석될 수 있다.

하여간 '나가수'는 참 대단한 프로그램인 건 맞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잡음과 논란이 많은 예능 프로그램도 근래 찾아보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 잡음과 논란이 하나같이 한국 대중음악계의 현실, 한국대중의 심리, 심지어 한국인의 민족정서까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화두를 던져줬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립싱크 금지법'과 같은 희한한 법안을 유도했다는 점 등에서 사회적 역할과 파장도 다시 생각해봄직하다.

차우진 평론가는 앞선 칼럼에서 '나가수'에 대해 "이런 구조라면 제 아무리 음악시장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고 해도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적어도 '나가수'가 한국 대중음악과 그를 둘러싼 상황들에 있어 오랫동안 점검되지 못했던, 꽤나 의미 있는 주장과 분석들을 이끌어낸 주역이라는 점 정도는 인정해줘도 좋을 법하다. '나가수' 관련 칼럼과 분석 기사들을 빠짐없이 읽으며 여러 관점과 입장을 배우고, 네티즌 포스트들까지 게걸스레 소비했던 필자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즐겁고 유익했다.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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