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지민, 왜 '아이돌의 아이돌'인가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2022. 3. 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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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사진제공=빅히트뮤직

작곡가 겸 프로듀서 방시혁이 JYP를 떠나 독자 기획사(빅히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때가 2005년. 랩을 하는 아이돌 그룹 론칭은 그로부터 5년 뒤 구체화시켰다. 랩몬스터(2017년부터 'RM'으로 바뀐다)라는 예명으로 불릴 김남준이 그해 빅히트에 들어왔고 언더그라운드 래퍼 키도(Kidoh)와 아이언, 슈프림 보이, 슈가를 더해 랩 기반 그룹이 결성됐다. 다시 1년 뒤 춤과 노래(나중엔 랩을 맡는다)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제이홉이 영입되고 2012년 초엔 정국과 뷔, 진이 오디션을 통해 빅히트에 둥지를 틀었다. 같은 해 여름엔 지민이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연습생들 중엔 정인성과 승준이란 인물도 있었는데 둘은 크나큰(KNK)이라는 아이돌 그룹에 따로 합류, 데뷔했다. 수웅이라는 연습생 역시 소년공화국에 합류하면서 빅히트를 떠났다. 방시혁은 당초 보컬 넷, 래퍼 넷으로 팀을 짤 생각이었지만 키도가 나가면서 마지막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7명만 남게 된다. 힙합 보이밴드 방탄소년단(BTS)의 시작이다.

BTS는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2012년 12월 17일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그 채널의 첫 번째 콘텐츠는 칸예 웨스트의 'Power' 비트를 타고 "삼 천만원짜리 지폐" 같은 국민으로서 한 표 행사를 독려한 RM의 랩 영상 '닥투(Vote)'였다.(이 영상은 20대 대선을 앞둔 지금에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RM은 이 영상에서 "기권은 중립이 아닌 동조"라며 "투표 하지 않는 사람은 비판도 비난도 말라"는 논조를 자신의 또래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향후 BTS가 가져갈 콘셉트가 '힙합 아이돌'임을 분명히 했다. 리더인 RM의 강렬한 랩으로 첫 발을 뗀 BTS는 이듬해 6월 12일 자신들의 첫 싱글 '2 Cool 4 Skool'을 내고 다음날인 13일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다. 그리고 7월 9일, 마침내 이들의 공식 팬클럽 이름이 나온다. 이제는 BTS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이름 '아미(ARMY, Adorable Representative MC for Youth)'다. 그렇게 '젊음을 대변해줄 귀엽고 사랑스럽고 숭배할 만한 엠씨'들은 앞으로 더욱 거대해질 팬덤을 등에 업고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그런데 잠깐. 나는 지금 BTS의 바이오그래피나 디스코그래피를 읊으려는 게 아니다. 그들이 이뤄낸 차트 성적이나 그들이 해나갈 도전 및 결과를 점치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대신 나는 BTS의 멤버 중 한 사람에 집중하려는 참이다. 'Butterfly' 독무로 킹덤의 아서에게 가수의 꿈을 심어준 사람. 'Black Swan' 안무를 커버한 MCND의 빅이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밝힌 인물. 언젠가 크래비티의 원진은 그 사람의 무대에 충격을 받았다고까지 말했다. 이 외에도 BDC의 김시훈, 뉴키드의 우철, 스트레이 키즈의 현진, 에이티즈의 우영, 빅톤의 임세준, TXT의 휴닝 카이와 범규, 엔하이픈의 니키와 제이도 BTS의 한 멤버를 닮고 싶다 공공연히 얘기했다. 이들은 결국 춤을 추면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그의 세계를 동경해온 것이다. 바로 지민이다.

사진제공=빅히트뮤직

앞서도 말했듯 지민은 BTS 라인업이 결정되기 몇 달 전 팀에 합류한 "BTS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연습생 시절 팀을 떠날 생각을 여덟 번이나 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그의 노래와 춤이 BTS에서 가질 지분을 생각하면 제법 아찔한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춤을 배운 지민은 일찍부터 자신이 무얼 꿈꾸는지 알았다. RM이 나스와 에미넴을, 슈가가 스토니 스컹크와 에픽 하이를 들으며 랩의 매력에 눈 떴듯, 또 정국이 지드래곤의 'Heartbreaker'를 듣고 음악의 매력에 빠졌듯 지민은 비(RAIN)를 보며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했다.

방과 후 댄스 학원에 다니며 꿈을 키워온 지민은 실용댄스(스트릿 댄스)에 가장 가까운 장르인 현대무용을 배우기 위해 부산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여기서 현대무용이란 말은 중요한데, 지민의 독창적인 독무가 바로 이 추상적인 동작으로 구체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댄스 장르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시기 지민을 곁에서 지켜본 댄스 학원장이 그가 "아이디어 뱅크였고 몸을 쓸 줄 아는 아이였다"고 증언한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는 곧 지민의 실력이 노력(아이디어 뱅크)과 재능(몸을 쓸 줄 아는)에 기대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아서와 빅 같은 후배들에게 영감을 준 것도 그런 춤에 대한 지민의 진지한 관심과 고민, 의지와 실천 덕분이었으리라. 언젠가 지민은 한 인터뷰에서 공연이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광범위한 감정과 느낌을 멤버와 관객, 스태프와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역시 그가 왜 댄서로서 '아이돌의 아이돌'이 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지민에게 퍼포먼스란 물리적 표현을 넘어 공연의 여러 요소를 묶는 매개체, 나아가 그걸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를 엮는 감정의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지민은 2012년 봄, 중학교 때 댄스 스승의 권유로 빅히트 오디션을 봤다. 그가 오디션에서 부른 곡은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당시 중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노래였는데 지민은 어쨌든 그 노래로 오디션을 통과했다. 빅히트 합류가 결정된 지민은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전학을 갔다. 고향을 떠난 지민은 자신의 한계라도 시험해볼 요량이었던 듯 새벽 3~4까지 춤 연습을 하고 잠깐 눈을 붙인 뒤 노래 연습까지 마치고선 학교엘 갔다고 한다. 아마도 그 맹렬했던 생활 패턴이 오늘의 지민을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 지민은 메인 댄서이면서 보컬리스트로 BTS의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우뚝 섰다. 가령 평론가 김영대의 표현처럼 고혹적이고 비장한 보컬 톤이 코러스에 이르러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Lie'와 지민 스스로 "목소리의 모든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면서 보컬 표현의 세세한 부분까지 집중"했다고 밝힌 'Serendipity', "지민이 아련한 고음으로 곡을 완전히 살렸다"고 RM이 평가한 'Fake Love' 등 그간 그가 부른 노래들은 그야말로 "완벽"(진의 표현이다)했다. 보라. BTS 커리어의 분기점이 된 '피 땀 눈물'의 시작도 지민의 목소리이지 않은가. 세상이 그의 음색을 별가루나 카나리아에 견주는 것도, 심지어 노래하는 지민을 "킬링 파트 제조기"라 부르는 것도 다 그런 곡들에서 지민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말들일 거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단단하지 않은 기반에 개성부터 찾은 셈"이라며 스스로의 보컬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건 겸손일까 욕심일까. "담백해지려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보컬리스트 지민의 다짐은 두 가지 다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미국 '아미'의 단초가 된 '아메리칸 허슬 라이프' 촬영 때 멘토였던 토니 존스는 지민의 긍정적인 태도를 말하며 "관객들이 원하는 걸 알면서 그걸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평소엔 수줍음을 잘 타지만 무대에 오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지민. 자신의 음악적 영감을 마이클 잭슨과 어셔 대신 다른 멤버들이 작업하는 모습에서 얻는다는 공감과 소통의 아이콘. 팬들은 그런 지민을 가리켜 "짐인(Jimin)하면 짐아웃(Jimout)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마 그를 흠모하는 후배 아이돌들에게도 이 공식은 유효했던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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