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선거판의 여우'는 왜 그림자로 살아야했나

김지혜 입력 2022. 1. 28. 18:33 수정 2022. 2. 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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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정치 드라마인 '킹메이커'(감독 변성형)는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운 유세장이 아닌 어두컴컴한 한약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웃이 자신의 닭장에서 달걀을 훔쳐가고도 모른 채 한다는 손님의 하소연을 들은 한 남자는 그에게 범인을 잡고 망신까지 줄 수 있는 묘안을 제시한다.

변성현 감독은 왜 이 장면으로 오프닝을 열었을까. 이 시퀀스는 '선거판의 여우'로 불렀던 인물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을 압축한다.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에서도 흥미로운 오프닝으로 관객의 사로잡았던 변성현 감독은 또 한 번 같은 형식을 사용하며 꺼내고자 이야기의 호기심을 높인다.

6.25 전쟁 후 북한에서 내려와 한약방을 운영하며 살던 서창대(이선균)는 약 짓는데 인생을 허비하기엔 능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은 것을 목격한 그는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자신의 남다른 '꾀'를 의미 있는 일에 쓰기로 결심한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왔던 인물이 단단한 신념과 철학을 가진 김운범(설경구)이었다. 서창대는 김운범의 선거 참모로 일하며 그가 '정치 거물'이 되는데 일조한다.

어떤 이들은 '킹메이커'가 대선정국을 노린 영화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때를 잘 만난 영화라고 하기에는 정치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지 않다. 심지어 이번 대선은 역대급 비호감들의 대결이라고 하지 않는가. 연일 쏟아지는 대권주자들의 뉴스도 지겨운 마당에 즐기려고 가는 영화관에서 정치물을 택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킹메이커'가 다루는 소재는 '옛날 이야기'다.

우려와 달리 '킹메이커'는 '정치'드라마라기보다는 정치'드라마'다. 故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선거 참모 엄창록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지만 인물의 연대기를 그리는 뻔한 전기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정의'와 '대의'에 관해 다른 철학을 가진 두 남자가 의기투합했다 이별하는 드라마다. 정치사를 통해 시대를 폭넓게 조명하는 정통 정치물을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대신 실제 역사와 인물을 모른다고 해도 캐릭터와 인물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과거의 인물, 옛날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지만 감각적이고 세련된 만듦새를 자랑한다. 특히 두 인물을 '빛과 그림자'에 비유한 영화의 명확한 콘셉트가 돋보인다. 조명의 명암 대비를 통해 '정치 거물' 김운범이 빛날수록 '숨겨진 참모' 서창대의 그림자는 짙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던 서창대의 신화를 속도감 넘치고 위트 있게 묘사한다. 당시는 TV가 보편적으로 보급되지 않아 대부분의 선거 운동은 발로 뛰어야 했다. 금권선거도 일반적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선거 전략이 기상천외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차원적이다 못해 다소 귀엽기까지 하다. 이 시절이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 독재 시절이고, 민주적 선거가 이뤄질 수 없는 환경이었던 점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지역감정의 기원을 다룬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가 적대적 관계가 된 것이 선거의 계략 중 하나였다는 것이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서창대의 전략이 단순한 편법을 넘어 공작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갈등을 빚게 된다.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서창대가 어떻게 역사의 그림자로 사라졌는지를 영화를 쓸쓸하게 그린다. 하나의 목표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의 빈틈을 매어주는 관계였지만, 목표에 다가가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두 사람이 갈라서지 않았다면, 엄창록이 그림자가 아닌 빛이 돼 세상에 나왔더라면, 현대 정치사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라는 궁금증도 유발한다.

변성현 감독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쓰인 단 몇 줄의 글을 읽고 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엄창록 신화를 흥미진진하게 부활시켰다. 이선균의 입체적인 연기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댄디한 도시 남자의 외모와 쿨한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이선균은 욕망과 열등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야망가 서창대로 분해 이제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을 보여줬다.

설경구 역시 훌륭한 연기로 영화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역사책 속 위인 같은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지만 모사가 아닌 해석으로 실존 인물의 입체화에 성공했다. 대사의 절반 이상이 연설 장면일 정도로 내면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많지 않다.

영화는 김운범에 대해 직접적으로 조명하기보다는 연설 장면을 통해 인물의 철학과 신념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여타 영화 속 연설 장면은 집중도가 떨어져 배경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 속 설경구의 연설 연기는 관객을 집중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두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조우진, 유재명, 김종수, 이해영, 박인환, 김성오, 전배수 등 '연기 선수'들의 제 몫을 다하는 열연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변성현 감독은 데뷔작 '나의 P.S 파트너', '불한당' 그리고 '킹메이커'에 이르기까지 매 작품 다른 장르와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감독의 끼와 개성이 영화에 그대로 투영돼 다소 뻔할 수 있는 이야기에도 '보는 맛'을 선사한다. 또한 배우의 숨은 매력을 끌어내는 남다른 눈은 배우들이 감독을 신뢰하고 애정 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무기다.

두 작품 연속으로 호흡을 맞춘 설경구를 필두로 조형래 촬영 감독, 한아름 미술 감독, 이길규 조명 감독까지 '변성현 사단'을 구축하며 동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선 시즌에 맞춰 개봉한 '킹메이커'는 '해적:도깨비 깃발'이라는 오락 영화와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설 연휴, 대선 정국이라는 두 외부적 요인이 영화의 성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궁금해진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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