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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죽음의 최종 배후는 '고려판 경국지색'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김종성 입력 2022. 01. 2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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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1TV <태종 이방원>

[김종성 기자]

KBS <태종 이방원>을 비롯한 각종 사극 속의 신덕왕후 강씨는 집중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 전처소생인 이방원이 더 많은 눈길을 끈다. 신덕왕후와 태종의 대립관계에서 후자가 승리했으니, 이 같은 관심도의 차이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승패 여하를 떠나 좀더 중립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신덕왕후가 역사에 끼친 파급력이 상당할 뿐 아니라 '주인공 이방원' 못지않게 '주인공 신덕왕후'도 꽤 흥미로우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강씨가 이성계의 작은부인이 된 것은 동북면 조강지처인 한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지만,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변화에 강씨가 끼친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계는 여진족 거주지인 동북면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장에 제약이 됐다. 그것으로 인한 핸디캡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정도전·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과의 연대다. 정몽주 같은 온건파 사대부들은 끝에 가서는 돌아섰지만, 오랫동안 이성계와 함께했다.

대체로 성리학적 교양으로 무장한 중소 규모 지주이자 지방 향리가문 출신인 신진사대부들은 공민왕 재위 기간(1351~1374)에 주류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구세력인 권문세족들을 약화시켜 나갔다. 바로 이 신진사대부들과의 제휴가 이성계의 출신지 콤플렉스를 상당부분 해소해줬다.

신덕왕후와의 인연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이 제휴만큼은 아니지만, 그 해소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 신덕왕후와의 인연이다. 가문의 역량이 곧 개인의 역량이던 그 시절, 강씨 집안 역시 이성계의 정치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었다.

강씨 가문은 신진사대부 쪽은 아니다. 그 반대편인 구세력이었다. 공민왕 즉위로부터 5년 뒤인 1356년에 신덕왕후가 출생했을 당시, 이 가문은 개경의 명문가였다. 권세가들과 혼맥으로 연결됐을 뿐 아니라 고려인 출신인 몽골의 기황후와도 닿아 있었다.

그랬던 이 집안은 공민왕이 반몽골 정책을 편 1356년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신덕왕후의 아버지는 물론이고 삼촌들도 역모 혐의로 체포됐다. 아버지 강윤성은 신덕왕후 출생 직후에 사형을 당했다. 이로 인해 이 집안은 개경을 떠나 황해도 곡산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황해도 동북쪽인 곡산은 함경도와 가깝다. 이쪽으로 이사 간 것이 이 집안을 부활시키는 계기가 됐다. 곡산은 이성계가 동북면과 개경을 오갈 때 지나는 곳이었다. 목마른 이성계가 우연히 만난 강씨에게 물 한 모금을 청했고, 강씨 가문과 이성계 가문은 혼인을 하게 됐다. 강씨 가문은 이 덕에 되살아났고, 이는 이성계의 개경 정치에 도움이 됐다. 신진사대부 가문은 아니지만 과거의 명문가라는 배경이, 개경 기반이 취약한 이성계에게 득이 됐다.

신덕왕후의 집안뿐 아니라 그 자신도 이성계에게 도움이 됐다. 1370년경에 만 14세 전후의 나이로 21세 연상의 이성계를 만난 강씨는 11세 연하인 이방원을 친아들처럼 뒷바라지했다. 이성계는 함경도가 아닌 개경에서 이방원을 교육시켰고, 이는 신덕왕후가 전처소생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이방원은 우왕 때인 1383년 만 16세 나이로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10대 나이로 급제하면 천재 소리를 들었다. 이방원의 급제는 그가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학업을 뒷바라지한 강씨의 공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과거 급제자 배출이 가문의 명운에 영향을 미치던 시절이니, 이성계 가문에 대한 강씨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대목이다.

강씨는 또 다른 측면으로도 이성계를 뒷받침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확보한 뒤에, 이성계의 대권 행보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을 없애는 역할을 맡았다. 때로는 이성계의 동의도 없이 그런 일을 할 때가 있었다.

<태조실록> 머리말에 따르면, 조선 건국 전에 이성계가 반대파의 공세를 견디다 못해 잠시 개경을 떠나려 한 적이 있다. 핵심 참모인 정도전은 "마음을 굳건히 하시라"며 만류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전해들은 신덕왕후는 정도전이 남편의 정계은퇴를 부추기고 있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가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방원을 불러 "정도전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행동을 촉구했다. 신덕왕후의 오해가 곧바로 풀리지 않았다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듯이 정도전도 어찌됐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 문제로 이성계와 갈라선 정몽주가 이성계의 와병을 틈타 총공세를 전개하던 시점에 이방원에 의한 선죽교 사건이 돌출했다. 이때 친어머니 삼년상 때문에 동북면에 있었던 이방원을 개경으로 급히 불러 정몽주 암살을 부추긴 인물도 다름 아닌 신덕왕후다. 정몽주 죽음의 최종 배후는 이방원이 아니라 신덕왕후였던 것이다.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이 점은 사건 뒤의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태조실록> 머리말에 따르면, 정몽주 피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이는 이성계였다. 그는 자초지종을 들은 뒤 이방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이때 방안에는 강씨도 있었다.

이성계는 "세상 사람들이 내가 정말로 이 일을 몰랐다고 하겠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방원은 "몽주가 우리 집을 해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라고 응수했다. 그런 뒤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돌아보며 "왜 어머니는 잠자코 계십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그제야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편들며 남편을 진정시켰다. 신덕왕후가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런 장면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정몽주를 죽인 것은 조선왕조 창업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뒤 이방원이 자신을 세자로 책봉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것도 이 사건 때문이다. 이방원은 자신이 책봉되지 않고 신덕왕후의 아들인 이방석이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위 대화에서도 나타나듯이 정몽주에 의해 초토화될 뻔했던 이성계 진영이 자신이 벌인 선죽교 사건 때문에 기사회생했다는 것이 이방원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죽교 사건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선죽교 사건을 지휘한 것은 외형상으로는 이방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덕왕후다. 이 사건 때문에 논공행상을 해야 한다면, 이방원뿐 아니라 신덕왕후 역시 지분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이방원이 최후의 승자가 되지 않고 신덕왕후 쪽에서 최후의 승자가 나왔다면, 신덕왕후의 역사적 위상이 훨씬 적극적으로 평가됐을 것이다. 정몽주 암살을 비롯한 여말선초의 역사적 사건들이 신덕왕후 중심으로 조명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남편을 도운 부분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가 필요하다. 동시에 이방원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고려 멸망을 재촉한 인물이 신덕왕후였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가 기울도록 만드는 데 가담했다는 점에서 '고려판 경국지색'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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