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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들 차에 탄 얘기'의 탄생..이제, 여자가 질주한다

한겨레 입력 2022. 01. 15. 09:06 수정 2022. 01. 15.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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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 특송
'델마와 루이스' 시나리오, "계집애 둘이 차에 탄 얘기" 폄하당해
성별 고정관념 비트는 '운전하는 여성' 한국영화에도 탄생
배우 박소담이 연기하는 은하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쿨한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는다.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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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는 여자의 탄생. 박대민 감독의 <특송>에 대한 한 줄 평이다.

시나리오 작가 캘리 쿠리는 여자 둘이 집을 나와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썼다. 이 시나리오는 1980년대 초부터 할리우드를 떠돌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은 한 제작자가 캘리 쿠리에게 한 말은 전설처럼 남아 있다. “계집애 둘이 차에 탄 이야기라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Two bitches in a car, I don’t get it.)”

결국 영화로 제작되어 1991년 극장에 걸렸을 때, 이 작품은 <타임>지 커버를 장식할 정도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당시 커버 제목은 이랬다. “<델마와 루이스>가 거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남성을 폭력 남편, 강간범, 그리고 강도로 그렸다고 성토했다. “부당한 묘사”라는 것이다. 그것만큼이나 그들을 짜증나게 만들었던 건 “계집애 둘이 차에 탄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성별 고정관념을 깨고 달리는 여성들

영화 문화가 ‘운전하는 여자’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건, 역사도 유구한 ‘김여사 타령’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남자에 비해 여자는 차를 잘 다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운전도 못하고 차에 관심도 없다는 편견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자=자동차 무지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2019년 즈음 한 통신사의 여성형 인공지능(AI) 가상비서에게 “어떤 차를 좋아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여자라서 차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후 인공지능의 젠더 편향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자동차에 대한 답변도 바뀌었다. 요즘은 “승차감이 좋고 튼튼한 차를 좋아한답니다” 등으로 답한다.)

실제로 2018~2019년 한국에서 개봉한 국내외 영화 40편을 분석한 결과 남성 캐릭터가 자동차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은 여성 캐릭터의 두 배였다. 여자들의 경우엔 자동차 대신 컵과 가구를 가까이했다. 영화 속 남자들이 공간을 넓게 쓰고 빠른 속도를 누리며 어디든 간다면, 여자들은 깨지거나 긁히면 곤란한 것들이 잔뜩 있는 공간에 갇혀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동차는 젠더 중립적이라기보다는 여성됨과 남성됨의 성격을 구성하는 역사적인 물건이고, 그건 자동차가 명백하게 이동성 및 자유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자가 차를 타고 탈주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쾌감을 준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는 <델마와 루이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소란스러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냐 아니냐를 두고 토론을 벌였고, 때로는 주인공 퓨리오사(샬리즈 세런)가 ‘유사 남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라는 의견이 등장하기도 했다. 단단한 근육질을 뽐내며 총을 휘갈기고 거대한 트럭을 모는 군인이기 때문에 그를 ‘유사 남성’으로 평가한다면, 그 평가에는 이미 남성됨과 여성됨에 대한 편견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적극적으로 성별 고정관념을 비틀어버린 <매드맥스>의 시도는 한국으로도 이어져 연상호 감독의 <반도>(2020)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운전하는 여자들’은 다양한 차종을 몰며 좀비 아포칼립스가 덮친 한반도를 누빈다. 이 작품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카체이싱은 오마주라고 할 만큼 이미지와 분위기의 구성에서는 <매드맥스>와 유사하면서도 세부적인 동선에서는 자기만의 개성을 잘 살려낸다.

<특송>이 선보이는 카체이싱 장면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세련되게 스크린을 파고든다. 뉴(NEW) 제공

그리고 2022년, 우리는 드디어 오로지 ‘운전하는 여자’에게만 집중하는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특송>은 배우 박소담에게 운전대를 맡긴 채로 가볍고 날렵하면서도 긴장감이 살아있는 카체이싱을 선보이면서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은하(박소담)는 사람 포함 ‘우체국 택배가 배달하지 않는 물건’이라면 뭐든 배달하는 특송 전문 드라이버다. 때로 현장에서 “운전대 잡은 놈이 여자라니 믿을 수 없다”는 편견과 만나기도 하지만, 크게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어차피 믿을 건 본인의 실력뿐이고, 관심 있는 건 일당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 좀 불법적이기는 하지만, 전문가이자 노동자로서 은하는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배달사고가 난다. 범죄조직과 경찰에게 두루 쫓기는 아이 서원(정현준)을 떠맡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국정원까지 따라붙은 상황. 은하는 어쩔 수 없이 서원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한다.

엔딩 이후의 이야기 기대 부추겨

은하가 선보이는 신기에 가까운 운전은 깔끔하다. 그는 그야말로 바퀴벌레처럼 움직여야 하는 특송 드라이버다. 가능한 한 눈에 띄어서도 안 되고, 문제나 사고를 일으켜도 안 된다. 온갖 것을 다 부수면서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과시하는, 지금까지 영화에서 흔하게 봤던 화려한 카체이싱과 달리, <특송>은 주위의 사물은 최소한으로 부수고 공간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날카롭고 세련된 카체이싱을 선보인다.

영화 또한 은하의 운전 실력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전개된다. 감독이 괜한 멋을 부렸다거나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의미가 모호한 장면 따위는 단 한 컷도 들어가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 역시 없다. “장은하는 한국 영화에선 보기 드문 쿨한 캐릭터”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이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면서 끊임없이 경계를 횡단하는 은하의 캐릭터와도 잘 어울린다. 이 정도면 ‘군더더기 없음’은 영화 <특송>을 규정하는 독특한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한국 오락영화에 고질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폭력성만큼은 이 영화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관객들 사이에서 <특송>이 드라마화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확실히 영화는 엔딩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부추긴다. 은하뿐만 아니라 국정원 한과장(염혜란)이나 자동차 수리 전문가 아시프(한현민) 등 주변 캐릭터의 디자인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주변 인물을 쉽게 도구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연을 잘 숨겨놓은 캐릭터 영화. <특송>을 묘사하는 또 하나의 한 줄 평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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