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당한 '지리산'을 김은숙 혹은 김수현 작가가 집필했다면

박생강 칼럼니스트 2021. 11. 1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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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드라마 '지리산'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상상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중반부에 이른 tvN 주말드라마 <지리산>은 시청률과 별개로 성공적인 드라마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미스터리, 휴먼, 오컬트, 스릴러 등 모든 요소를 품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어느새 길을 잃고 만다. <지리산>의 지리산에서 종종 조난 장면이 나오지만, 시청자도 <지리산> 드라마 안에서 조난당하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지리산>에서 무슨 이야기를 보는 거지? 나는 어떤 줄거리를 따라가야 하는 거지? 아웃도어 광고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요구르트와 감자폭탄에 대한 <서프라이즈>를 보고 있는 걸까?'

결국 보는 내내 길을 잃다 보니 어느새 <지리산>은 길을 잃은 드라마구나, 라는 마음으로 시청하게 된다.

물론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산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수많은 산악회가 증명하듯, 한국인은 산을 사랑하지만 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딱히 선호도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의학드라마나 법정드라마처럼 선과 악을 배경으로 긴박감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여기에 <지리산>은 한국의 명산 지리산을 배경으로 토속 오컬트적인 신비감도 만들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도 <지리산> 국립공원 레인저들 중심으로 한 가지 설정으로 밀고나갔다면, 조금은 익숙한 드라마라도 <지리산>의 안개는 좀 걷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강은경 작가였다면 <지리산> 레인저들의 활동을 통해 조난 서사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면 서이강(전지현)과 강현조(주지훈)가 숨차게 뛰어다녔을 것이고, 조대진(성동일)은 좀더 무서운 분소장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어차피 의학드라마 병원에서도 끊임없이 사건사고가 터지니, 산 아래 응급병원도 등장시키면 매회 긴장감 있게 이야기가 풀렸을 것이다. 산에서 일어나는 사고도 불륜부터 암살까지 매회 에피소드마다 바꿔가며 갈 수 있고.

<도깨비>의 김은숙 작가나 <별에서 온 그대>의 박지은 작가였다면 <지리산>의 강현조 레인저는 인간이 아니라 산신령일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 하지만 도깨비나 외계인과도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데, 산신령도 인간 레인저와 로맨스를 할 수 있을 듯.

반면 가족극의 대모 김수현 작가라면 <지리산>을 소재로 대가족 드라마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그렇듯 <지리산> 부근으로 귀농한 강 씨 할아버지 일가. 그런데 그 집 만년 백수 큰 손자 강현조(주지훈)가 우연찮게 지리산 국립공원 레인저 계약직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곳 고향 출신 강 씨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에그드랍 대신 레인저 해동분소까지 종종 새참을 가져다준다. 그러다 레인저 서이강(전지현)이 손주며느릿감으로 눈에 들어오고, 할머니의 오지랖 때문에 강현조는 민망. 하지만 그러다 둘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또 김수현 작가의 <지리산>에는 한번 결혼에 실패한 강씨네 큰딸도 나올 법하다. 배우는 오랜만에 김수현 드라마에 들어가는 이유리 정도면 괜찮겠다. 그녀는 레인저 정구영(오정세)을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녀에게 반한 것은 홀아비 레인저 조대진(성동일)인데. 하여튼 아마 이렇게 레인저들과 대가족의 관계가 얽히면서 50부작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후반에는 강 씨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리산에 묻히고 레인저와 강씨네 일가가 함께 무덤가에서 울면서 시청자의 눈물샘을 터뜨린다.

한편 임성한 작가가 <지리산>을 배경으로 썼다면 강현조 역은 주지훈이 아니라 이태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또한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망령이 레인저들에게 빙의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레인저들이 해동분소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도 전복, 꽃게, 지리산 특제 버섯이나 나물 같은 특이한 식재료를 넣으며 라면 맛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김순옥 작가의 <지리산>이라면 지리산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산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레인저들 사이에 연애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해질 수도 있다. 심지어 감자폭탄과 요구르트는 분노조절장애 빌런 레인저들의 암살 무기로 쓰일 가능성도 높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현재의 <지리산>은 실제로 이 모든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오컬트, 로맨스, 휴먼드라마, 스릴러까지.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지리산>은 이 요소들을 배낭에 넣고 올라가는 빠르고 쾌적한 이야기의 등산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을 배경으로 재밌는 드라마를 만들기가 쉽지는 않지만, 꼭 그것만이 <지리산>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물론 화면 속의 명산 지리산이 아름답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여전히 티가 나는 CG가 그 감흥을 깨긴 하지만.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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