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차차차', 이 장면 없이는 로맨스 못하나요?

이유정 입력 2021. 9. 2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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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멜로 드라마에서 '범죄'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

[이유정 기자]

tvN 주말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는 바닷가 시골마을 '공진'을 배경으로 치과의사 혜진(신민아 분)과 홍반장 두식(김선호 분)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두 주인공을 비롯해 어딘가 미운 구석이 하나쯤 있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따스하게 펼쳐진다. 

돈과 성공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인 혜진과 최저시급으로 알바를 하며 동네 일에 사사건건 관여하는 두식은 얼핏 겹치는 것 없이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서로에게 끌리는 혜진과 두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과정을 마냥 흐뭇하게 지켜볼 수가 없다. 둘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로맨스를 만들어내는 요소로 반복해서 사용되는 소재가 다름 아닌 범죄이기 때문이다.

성추행범 응징하고 강도 때려잡는 남주

지난 10회에서는 함께 살던 친구가 잠시 서울로 가고 혼자 남은 혜진의 집에 강도가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이 담겼다. 그때 어디선가 두식이 나타나 혜진 대신 칼을 맞고, 이 일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런 장면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4회에서도 혜진이 운영하는 치과에 성추행범이 나타나자 두식은 경찰보다도 더 빨리 현장에 도착했다. 증거품인 핸드폰을 들고 성추행범에게 찾아가 으름장을 놓은 쪽도 두식이다.  

드라마는 종종 지금의 현실에 기반을 둔다. 드라마에서 언급된 장면도 실제 여성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범죄를 다뤘다는 점에서 문제될 건 없다. 그러나 <갯마을 차차차>에서와 같이 '여성 대상 범죄'가 위험한 현실을 드러내거나 경각심을 주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오로지 로맨스의 매개로만 협소하게 활용될 때, 결과적으로 범죄는 사라지고 로맨스만 남게 된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장면
ⓒ tvN
 
남자 주인공이 범죄 위기에 놓인 여자 주인공을 구출하는 장면을 로맨스로 포장하는 방식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많은 멜로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되어 온 전통적인 장치다. 해당 장면은 주로 캐릭터 간의 감정과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써만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데 그친다. 오직 로맨스만을 위해 기능하도록 설정된 전개에서 여성이 겪는 위험이나 범죄의 심각성은 쉽게 희석된다. 

<갯마을 차차차>에서 극중 성추행, 강도 사건 이후 혜진이와 친구 미선이 서로를 걱정하며 끌어안는 장면이나 이를 바라보는 남성 캐릭터들의 모습을 다소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연출도 세심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빌어 웃고 넘어가기에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그리 가볍지 않다. 

여성 캐릭터를 '지켜주는' 것만이 사랑일까

로맨스 장르와 범죄 소재가 결합할 때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전형적인 성 역할과 이미지를 고착화한다는 점이다. 멜로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의 안전을 걱정하며 나아가 범죄로부터 적극적으로 구해내는 사람은 대개 로맨스 관계에 있는 남성 캐릭터인 경우가 많고, 이는 곧 상대를 향한 관심과 애정으로 치환된다. 마치 '여성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든든한 남성'이 바람직한 남주의 상으로 인식되면서 남성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구원자 이미지를 계속 부각하는 것이다. 

<갯마을 차차차>의 남자 주인공 두식도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두식은 늦은 밤 골목을 순찰하며 혜진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를 살피는가 하면 혜진의 집 앞에 불이 나간 가로등 수리를 요청하고, 강도 사건 후에는 혜진의 집 창문에 직접 방범 장치를 설치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남성은 마땅히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낡은 관념을 강화한다. 드라마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상황에서 혜진에게 아무도 없었다면 벌어졌을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찔해지고, 자연스레 두식의 존재에 안도하게 된다.

이 빈곤한 상상력은 "여성에겐 위기 상황에서 구해줄 남성이 필요하다"는 구태의연한 결론에 손쉽게 도달하게 한다. 결국 멜로 드라마 속 여성은 계속해서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 존재하고, 보호의 주체는 제도나 시스템을 넘어 오직 상대 남성으로 한정된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스틸컷
ⓒ tvN
 
<갯마을 차차차> 속 혜진은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며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 망설임이 없고, 발차기로 성추행범을 제압하기도 하는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둘의 관계성과 애정을 확인하는 용도로 혜진을 자꾸만 위험한 순간으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다. 생명의 위협이 오가는 공포의 순간에 개입하는 로맨스는 불편하고 불쾌할 뿐이다. 

이제 남성 캐릭터가 구하고 지켜주는 것으로 설렘을 표현하는 멜로 드라마의 뻔한 공식을 벗어날 때가 됐다. 여성 캐릭터의 로맨스 상대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손전등을 비춰주거나 대신 칼을 맞아줄 '일방적인 구원자'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의미다. 더 넓고 세심한 상상력의 세계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의 관계 맺기와 로맨스는 범죄 없이도 충분히 다양하고 풍성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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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중복 게재됩니다(https://brunch.co.kr/@cheeky/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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