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최측근 김개시, 실제로 이 정도였을 줄이야

김종성 2021. 5. 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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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

[김종성 기자]

 지난 23일 방송된 MBN 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한 장면
ⓒ MBN
  
광해군의 옹주(권유리 분)가 보쌈을 당해 뜻밖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가상의 스토리를 담은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에는 두 명의 광해군 최측근이 등장한다. 상궁 김개시(송선미 분)와 좌의정 이이첨(이재용 분)이 그들이다.

두 측근 중에서 훨씬 비중 있게 묘사되는 쪽은 이이첨이다. 드라마 속의 이이첨은 광해군의 여당인 대북당 세력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광해군도 이씨이기는 하지만, 이이첨과 같은 계파를 형성하는 '친이계'가 '계파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드라마 속의 김개시는 권세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광해군과 의사소통을 많이 하는 측근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김개시의 정치적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게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양상은 달랐다. 광해군 정권이 무너진 지 7개월 뒤에 기록된 음력으로 인조 1년 9월 14일자(양력 1623.10.7) <인조실록>은 이이첨이 김개시와의 협의를 거쳐 정부 인사권을 행사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조를 맞추는 중에도 주도권을 잡은 쪽은 김개시였다.

위 실록은 "이이첨이 김에게 빌붙었다(李爾瞻附托於金)"고 말한다. 원문에 쓰인 부탁(附托)은 오늘날 사용되는 부탁(付託)과 뉘앙스가 다소 다르다. 상하관계나 종속관계를 강조해서 번역해야 원문에 쓰인 '부탁'의 뉘앙스를 살릴 수 있다. 드라마 <보쌈>이 묘사하는 권력구도와 상반된 양상이 김개시와 이이첨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다.

여론 움직이는 사대부와 교유한 김개시

김개시의 구체적 역할은 오늘날의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에 비견될 수 있었다. 그는 여론을 움직이는 사대부들과 교유했고, 수시로 대궐 밖을 나갔다. 위 실록은 이렇게 말한다.

"사대부로서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김개시에게) 매달리고 빌붙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사람은 예컨대 (이)이첨, 성진선 부자, 박홍도 무리였다. 김은 이 부류의 집에 수시로 출입했으며, 간혹 추잡한 소리가 파다하게 들리기도 했다."

광해군의 왕권이 후계자에게 안정적으로 승계됐다면, 이런 식으로 서술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대부들에 대한 김개시의 영향력이 상당했으며 그중에서도 이이첨, 성진선 부자, 박홍도 등이 김개시를 특히 많이 따랐다는 식으로 서술됐을 것이다.

인조 정권에 의해 부정적으로 서술되기는 했지만, 위 기록은 김개시가 정무수석비서관 역할을 얼마나 왕성하게 수행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실록에 언급된 성진선의 아들은 광해군 정권이 정적 숙청을 목적으로 인목대비 폐위를 추진할 때 상소 활동에 적극성을 보인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과 접촉할 목적으로도 김개시가 대궐 밖으로 나가곤 했던 것이다.

상궁 김개시뿐 아니라 정3품 후궁인 정소용(소용 정씨)도 국정 운영에 적극 참여했다. 광해 5년 12월 30일자(1614.2.8) <광해군일기>는 정소용을 두고 "일에 익숙하고 문서 출입을 관리했으며 왕을 대신해 재가를 내려 왕이 곱절로 신임했다"고 말한다. 광해군을 위해 문서행정을 관리할 뿐 아니라 광해군을 대신해 왕명까지 내렸다고 했다. 정소용의 활동 역시 상당했음을 느낄 수 있다.

후궁과 상궁 옆에는 보좌진이 배치돼 있었다. 궁녀들이 이들의 직무수행을 보좌했다. 상궁 김개시와 후궁 정소용의 정치적·행정적 역할이 상당했다는 사실은 이들을 보좌하는 궁녀들의 역할도 왕성했음을 의미한다. 두 사람을 보좌하는 궁녀들 역시 광해군의 비서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여성의 리더십이 상당했던 조선시대
 
 지난 23일 방송된 MBN 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한 장면
ⓒ MBN
 
그런데 <보쌈>을 포함해서 이 시대를 다루는 사극들은 그런 측면을 충분히 다루지 않고 있다. 김개시를 비중 있게 다루는 사극은 있지만, 여타 궁녀들이나 정소용 등을 제대로 묘사하는 사극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개시를 비중 있게 다루는 사극도 김개시 한 사람에게만 주목할 뿐, 그를 따르는 궁녀들이 팀을 이뤄 활동한 측면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극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여성의 리더십은 상당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시대보다 더한 측면도 있었다. 과거의 주력 산업이 농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점이 쉽게 수긍될 것이다.

조선시대를 주도한 집단이 선비들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정치적·철학적으로 그랬다는 의미이지 모든 분야에서 다 그랬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나 철학보다 훨씬 더 대중의 삶과 직결되는 경제 분야에서는 지주계급이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지주들의 상당수는 여성이었다. 부모에게서 노비와 토지를 상속받는 여성들은 시집간 뒤에도 자기 명의로 권리를 유지했다. 노비주와 지주의 법적 지위가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이런 여성들은 오늘날의 사장님 이상으로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

또 지주인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경우에는, 자녀들이 있다 하더라도 부인이 남편의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 많았다. 일례로, 임진왜란 13년 전인 선조 12년 6월 7일(1579.6.30)에 작성되어 관청에 접수된 노비매매 약정서에 따르면, 이 약정서의 매도인은 '고(故) 학생 나윤위의 처 곽씨'였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관직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학생 나윤위의 부인인 곽씨가 나윤위의 노비들을 매매하게 됐던 것이다.

이는 나윤위 사후에 부인 곽씨가 나윤위의 노비들을 이끌었음을 의미한다. 노비들의 상당수는 소작농이었으므로, 곽씨는 나윤위의 노비들뿐 아니라 그 토지에 대해서도 권리를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정 운영이 깊숙이 개입한 김개시, 정소용

관료 겸 화가인 장한종(1768~1815)의 <어수신화>에는 근 1천 명이나 되는 노비를 이끄는 홍씨 부인이 등장한다.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지내는 그는 경기도 안성·이천과 경상도 예천 등지에 있는 노비와 토지를 관리했다. 이 책에는 그의 사위들이 장모의 지시를 받고 노비들에게 공물을 받으러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노비 1, 2천 명을 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기록에 종종 나온다. 노비 가구가 일반적으로 4인 가족을 구성했으므로, 노비 1천을 뒀다는 것은 250 가구 정도를 이끌었다는 의미가 된다. 웬만한 조정 관료들도 이 정도 영향력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임금님'보다는 '지주'가 농민들의 삶에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군주의 정치가 지주계급의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지주들의 상당수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옛날 대중들 역시 여성의 리더십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을 거친 조정 관료들 중에 여성이 없었다고 해서 여성의 리더십이 약했다고 곧바로 단정할 수는 없다. 경제를 지배하는 지주계급의 상당수가 여성이었으므로, 옛날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여성의 리더십에 익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김개시나 정소용이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 시대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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