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상류층에 흑인이? 이 드라마의 진짜 논란은 따로 있다

이선필 입력 2021. 1. 14. 10:48 수정 2021. 1. 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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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에 담긴 다양성, 그리고 가부장제

[이선필 기자]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지난해 12월 최초공개 후 현재 넷플릭스 집계 3위에 해당하는 드라마가 있다. 오리지널 드라마로 여기저기 광고 중인 <스위트홈>과 달리 국내에서 홍보마케팅을 크게 진행하지 않았음에도 가입자들 다수의 선택을 받고있는 <브리저튼>이다.

드라마는 19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왕실을 비롯한 귀족 등 상류층 사회가 소재인데 브리저튼 가문의 8남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로맨스 장르물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꽤 진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랑의 본질과 인류의 오랜 난제인 가부장제에 대한 것들이다.

복잡다단한 드라마 구조

21세기를 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결혼은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하물며 19세기, 그것도 신분제가 노골적으로 존재한 영국 사회인데 두말 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혼기가 차 낭만적인 신혼생활을 꿈꾸는 다프네 브리저튼(피비 디네버)이 신랑감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겪는 온갖 사건 사고가 주 골격이다. 

매년 따뜻한 봄부터 가을 무렵까지 진행되는 사교철엔 상류층만의 교류 행사가 이어지는데 자식을 가진 부모는 물론이고 여왕 샬롯(골다 로쉐벨), 이하 온갖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어엿한 청년들의 혼사다. 공작, 남작, 자작 등 귀족 간에도 일종의 계급이 있던 시대기에 어떤 집안과 혼인하느냐에 따라 가문의 명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중에 다프네가 여왕의 눈도장을 받으며 사교계의 다이아몬드로 떠오른다. 그럴싸한 청년들이 줄지어 구혼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다프네와 그의 가족은 뜻하지 않은 여러 염문에 휩싸이고 졸지에 순결이 더럽혀져 제대로 결혼마저 못 할 것이란 추측이 난무하다. 이와중에 염문의 상대자로 지목된 사이먼 헤이스팅스(레지 장 페이지)가 등장한다. 공작 지위를 가진 건장한 청년인데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소문난 이다. 

이 두 사람이 사람들의 편견과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일종의 계약 연애를 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이 가지 뻗기를 하는데, 그 주인공이 다프네와 사이먼 두 사람일 때도 있고. 다프네와 사이먼 주변 인물일 때도 있다. 8남매인 브리저튼 가문과 이들과 밀접하게 인연을 맺고 있는 여러 이웃들이 서로 맞물리며 도움을 주고받기도, 혹은 서로를 경계하거나 미워하기도 하는 게 이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다.

이런 가지 뻗기가 시청자들에게 명료하게 전달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드라마 내에서 주요 사건을 정리해주는 화자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마담 휘슬'이라 부르는 신원미상의 존재는 내레이션으로 등장인물의 감정 상태나 사건의 본질을 맛깔나게 설명한다. 동시에 마담 휘슬은 드라마 내에선 일명 '소식지'를 발행하는 작가이기도 한데 그 소식지라는 게 상류층 사회 온갖 구석에서 벌어지는 소문과 특정 인물들의 사생활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그 소식지에 오르내리는 걸 꺼리면서도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남 이야기 좋아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인 듯하다. 마담 휘슬은 이런 온갖 소문에 자신의 비평을 늘 덧붙이는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증권가 정보지 혹은 연예인의 열애와 이혼 여러 사생활 보도에 혈안이 된 일부 연예 매체를 떠올릴 수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가부장제의 중력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다

제작 단계에서 <브리저튼>은 일명 '블랙워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백인 캐릭터만 고집하는 화이트 워싱에 상대되는 말인데 주인공 중 한 명인 사이먼과 여왕 샬롯, 그리고 몇몇 귀족이 흑인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인물이었던 샬롯 여왕의 초상화 등을 보면 흑인의 혈통이 섞였다는 말이 나오기 십상인데 영국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1800년대 영국 상류층에 흑인이 있다는 설정에 낯설 법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그 자체가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물론 제작진도 이를 인지한 듯 "조지 왕이 흑인(샬롯)을 사랑해서 신분이 상승할 수 있었지 여전히 흑인은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 등의 대사로 어떻게 흑인 귀족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할 수 있는지 설명하긴 한다. 

사실 인종 논란보다 주목해야 할 건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가부장제,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다. 줄리아 퀸이 쓴 총 8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브리저튼>은 상류층 사람들, 사교철에 벌어지는 여러 풍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도 주인공 다프네가 겪는 일종의 성장통에 주목한다. 키스를 당했다는 이유로 정조가 더럽혀졌으니 반드시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친오빠 말에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라 응수하는 다프네지만, 그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내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부장제에 포섭돼있다.

반드시 남자가 여성에게 청혼해야 하고, 여성은 그 청혼이 들어오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인 양 살아가는 게 <브리저튼>이 묘사한 상류층의 단면이다. 동시에 각 등장인물이 겪는 사건을 통해 그런 강한 가부장제의 사슬에 작은 균열을 내고자 하는 게 이 드라마의 장점 중 하나기도 하다. 

이를테면 브리저튼 집안의 장남 앤소니(조나단 베일리)는 시종일관 집안을 건사해야 하고 타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권위적으로 다프네나 형제들을 대하면서도, 스스로는 자기 신분에 맞지 않는 오페라 가수를 사랑하는 것에 괴로워한다. 차남 베네딕트(루크 톰슨)은 가족 몰래 화방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리곤 하는데 역시 신분에 맞지 않는 양장점 주인과 몰래 사랑을 즐기며, 셋째 콜린(루크 뉴튼)은 혼전 임신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가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특히 여성 묘사에서 그런 가부장제의 균열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유일하게 기존 결혼관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물이 바로 다프네의 동생 엘로이즈(클라우디아 제시)와 그의 절친 페넬로페(니콜라 커그랜)다.

엘로이즈는 결혼과 출산이 인생의 목표라 믿는 다프네를 시종일관 비파하면서 본인은 시종일관 마담 휘슬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혈안이 돼 있다. 페넬로페는 본인의 외모 때문에 청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슬퍼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고운 마음을 베푸는 캐릭터로 묘사돼 있다. 

브리저튼 남매의 엄마인 바이올렛(루스 겜멜)은 일찌감치 남편과 사별한 캐릭터인데 딸들에게 결혼과 출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들의 괴로움을 누구보다 이해하며 위로한다. 마담 휘슬의 소식지로 평판이 심하게 깎인 다프네를 두고 장남이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일 땐 "이런 건 여성들의 방식으로 해결해야지"라면서 지혜롭게 해결하는 대목에선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드라마 전개가 다소 느리고 앞서 언급한 엘로이즈 등의 캐릭터가 좀 더 입체적으로 묘사됐으면 하는 아쉬움 등이 있지만 <브리저튼>은 비교적 원작의 매력을 잘 살린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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