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난타로 韓공연 세계에 알려→실명 위기 긍정 마인드로 극복"(마이웨이)[어제TV]

최승혜 입력 2020. 12. 1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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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최승혜 기자]

송승환이 '난타'의 성공부터 실명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12월 14일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마이웨이’에서는 배우, 공연 제작자와 연출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인 송승환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이날 송승환은 9년만에 무대에 오르는 연극 ‘더 드레서’ 홍보를 위해 KBS라디오 부스를 찾았다. 송승환은 “KBS와는 인연이 깊다. 1965년 KBS에서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당시에는 KBS가 남산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제작진은 송승환의 사무실을 찾았고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에는 인색하시다”고 말했다. 이에 송승환은 “저는 작품 속 캐릭터로 시청자에게 보여주면 되는 거지, 역할이 아닌 본래 사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밝혔다.

송승환은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사무실을 공개하며 그 이유로 “요즘엔 잘 안보이니까(정리정돈을 잘 한다)”라고 말했다. 송승환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시력 저하가 와 실명 위기에 놓인 사실이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한 바 있다. 그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늘 보던 휴대전화 메시지가 글자를 크게 해도 안 보였고, 어느 정도 보이던 얼굴이 점점 안갯속으로 들어가더라. 의술의 힘을 빌려야 하니까 서울의 대학병원, 미국의 유명 안과, 일본까지 찾아 다녔다”며 “근데 이 병이 치료방법이 없다더라. 그때부터는 눈이 안 보이는 가운데서도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잘 보이게 하는) 기구들도 찾고, IT기술도 습득했다”고 밝혔다.

그는 “딱 한번 아무도 모르게 밤에 나 혼자 울고 그걸로 끝이다”라며 “시력이 나빠지는 건 멈췄다”며 웃어 보였다. 제작진이 삶에 대해 긍정적인 이유를 묻자 송승환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실패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송승환은 “제가 데뷔했을 때 TV에 나온다고 하면 굉장히 잘 사는 집 아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셔서 어쩔 수 없이 소년 가장이 됐다”고 밝혔다. 송승환은 8살에 아역배우로 데뷔한 이후 하이틴스타로 거듭났고, 한참 활동을 하던 시기에 미국유학을 발표했다. 송승환은 “당시 유럽여행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뉴욕의 브로드웨이까지 가서 뮤지컬을 관람했다. 뮤지컬을 보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다. 젊어서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런 도시에 와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부모님이 사업에 여러 번 실패해서 빚이 많이 있었다. 부모님이 진 빚이지만 제가 다 갚아드렸고 친구 집에 방 한 칸만 얻어서 살고 있었다. 밖에서는 스타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며 “그때 아내를 만났다. 아내한테 많은 위로를 받았고 약혼식만 하고 미국으로 갔다. 마침 아내의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상태여서 같이 가게 됐다”고 밝혔다. 송승환은 “그때 부모님 빚을 다 갚아드려서 거의 돈이 없었다. 거의 맨손으로 미국을 갔다. 몇 천 달러 안 들고 미국을 갔다”고 밝혔다.

그는 “그때 월간지 기자가 저를 취재하기 위해 뉴욕까지 왔었는데 ‘시계 장수로 살고 있다’는 내용만 부각이 됐다”며 “미국에서 살았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았다. 뮤지컬 관람하면서 좌판에서 시계 장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아내가 고생하지 않았냐”고 묻자 송승환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아내도 좋아했다”며 “또 신혼이기 때문에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고 밝혔다.

송승환은 미국생활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를 무대에 올렸다. 송승환은 “보통 연극이라고 하면 대본이 있어야 하지 않나. 텍스트가 좋은지 생각하게 되는데 브로드웨이에서도 넌버벌 공연이 정말 많았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난타’를 성공시킨 뒤 그는 세계적인 공연으로 키우기 위해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송승환은 “참가하려면 현금 3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는데 1억원 정도가 모자랐다. 그때 친구한테 부탁했더니 집 담보를 받아서 1억을 빌려줬다. 그때 친구가 빌려주면서 하는 말이 ‘우리 마누라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돼’였다. 결국 대 성공을 거뒀고 그 친구의 와이프가 알기 전에 돈을 갚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송승환은 절친 임백천과 만났다. 임백천은 “장관 제의를 거절했던데”라며 “나한테 제의가 왔다면 청문회에서 안됐을 거야”라며 웃었다. 이에 송승환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제의 자체가 거절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전혀 내가 관심이 없는 일이니까”라고 밝혔다. 임백천이 “승환이 형이 최초의 멀티 플레이어다”라고 치켜세우자 송승환은 “그 때는 멀티플레이어가 별로 없었다. 그 당시 쇼프로그램 MC도 배우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라고 밝혔다.

송승환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감독을 맡아 성공적으로 마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올림픽 개폐막식이 넌버벌 공연이다. 제가 20년간 해왔던 공연이 넌버벌 퍼포먼스였기 때문에 도전했다”며 “중간에 ‘내가 이걸 왜 했지’ 후회를 몇번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당시 예산이 600억원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은 개폐회식 예산이 6,000억원이었다. 중국에 비하면 10분의 1 가지고 만들어야 했는데 정부와 올림픽 관계자들이 ‘저비용 고감동의 올림픽을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주문했다. 또 평창에 살을 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드론을 띄우기가 힘들었다"고 떠올리며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대사가 있다. 끝나고 나서는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건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개회식, 폐회식 배우들, 스태프들까지 6,000명의 힘이다. 그 때 올림픽 기간 내내 날씨가 좋았던 날이 딱 이틀 있었다. 개회식, 폐회식 때였다. 우리 올림픽을 성공시키자는 한마음이 됐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좋은 날을 만들어주시지 않았나 싶다”고 밝혔다.(사진=TV조선 ‘스타다큐-마이웨이’ 캡처)

뉴스엔 최승혜 csh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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