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각본으로 두 개의 영화, 달라도 너무 다른 결말
[안치용 기자]
▲ 영화 <얼론> 스틸 컷 |
ⓒ (주)안다미로 |
각본가는 감독이나 주연배우만큼 각광받지 못하지만 중요도로 따지면 각본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잘못된 각본을 가지고는 아무리 명감독이고 명배우라고 해도 놓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유명 감독 중에 자신의 각본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 형편을 이해할 만한다. 가수 중에 싱어송라이터가 더 인정받는 맥락과 비슷하다.
코로나19바이러스감염증으로 영화계가 전례 없이 고전하는 가운데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한 각본가의 한 각본으로 두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아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같다"고 판정해도 될 만큼 내용이 유사하다. 미국에서 제작된 <얼론(Alone)>과 한국영화 <#살아있다>이다. 맷 네일러라는 외국인 각본가가 <얼론>의 제작에 참여한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같은 내용으로 한국 영화 각본까지 맡은 건 이색적이긴 하다.
산만하고 개연성도 떨어져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각본이어야 한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망작(亡作)에 가깝다. 두 영화 모두 산만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고, 전개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는 데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거의 비슷하지만, 동시에 '중요하지 않은' 많은 디테일의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남자 주인공이 쓰는 무기가 골프채(유아인)와 야구방망이(타일러 포시)란 차이를 보이고, 집안에 침입자가 들어오는 경로와 그 성별이 다르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상식량의 차이가 두드러졌는데, 먹방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살아있다>는 '라면' 장면을 부각해 편집했다. 결과적으로 <기생충>의 패러디도 아니고 PPL도 아닌 자발적 라면CF로 판명된다.
두 영화 모두 (이게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 애매하지만) '본격' 좀비영화가 아니다. '얼론'과 '살아있다'란 작명의 강조점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보아 말하자면 '절대고독'에 위리안치된 개인의 모습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망작에 가까운 두 영화 중에 덜 나쁜 쪽을 고르라면 <#살아있다>일 텐데, <얼론>보다는 고독의 직접적 현상에 덜 집중하고 끊임없이 연결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위리안치를 설명한다. <얼론>은 주인공(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한 사람이다)의 위리안치와 돌파, 그리고 사랑과 헌신을 통한 삶의 의미부여라는 구조를 취한다.
▲ 영화 <얼론> 스틸 컷 |
ⓒ (주)안다미로 |
반면 <얼론>은 고독에 주력하면서 조심스럽게 연결을 모색하지만, 연결이 너무 우악스러웠다. 연결은 이성간 사랑이란 익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진부한 대사, 시시한 'Peeping Tom' 장면 등으로 구성된 어처구니없는 로맨스를 너무나도 박력 있게 보여준 배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궁금증이 든다. 사랑의 심리기제가 설득력이 없었다는 근본적인 지적사항을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사랑의 문법이 '미녀와 야수'의 틀에 고착됐다는 점이다. 건너편 아파트 여자는 주인공 남자에 비해 너무 무력하고 과도하게 의존적이다. 그러나 남자는 극중 대사처럼 용감하고 유능하게 난관에 대처하고 때로 멋있게 문신한 상반신을 보여주며 시종일관 남성미를 '뿜뿜'한다. 한마디로 여성은 전형적으로 대상화한다. 심지어 주인공 남자의 집에 침입하였다가 야구망방이에 맞아죽은 좀비마저 여성이고 주인공 남성에 들린 그 시체는 늘씬한 몸매로 제공된다.
여성 캐릭터의 차이
두 작품에서 가장 차이나는 장면은 엔딩이다. <#살아있다>는 예기치 못한 구조(救助)라는 황당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반면, <얼론>은 주인공 남성이 서부영화 주인공처럼 '멋진 남자'를 시전하는 코미디에 이어 여자와 함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열린 결말을 선택한다.
<#살아있다>가 <얼론>에 비해 확고하게 나은 지점은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에 밀리지 않는 주인공으로 세웠고, <얼론>과 정반대의 여성상을 설정했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일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힘들지만 현대 여성상은 <#살아있다>가 그린 것에 근접하지 <얼론>과는 멀어도 한참 먼 거리에 위치한다.
<얼론>이 영화에 필요한 요소로서 그런 캐릭터를 설정했다면 또 납득할 만하지만, 결과물이 보잘것 없다는 견지에서 의미 없이 여성이 한 번 더 소비된 사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싶다. 엔딩의 차이가 어쩔 수 없이 여성상의 차이로 연결되었을 터인데, 그렇다고 <#살아있다>를 좋은 영화라고 판단하게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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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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