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진이 기획 풀을 공유한 것 같은 파일럿의 예정된 몰락

김교석 칼럼니스트 2020. 10. 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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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파일럿, 부실한 예산 핑계 대기엔 상상력이 너무 빈곤했다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명절 파일럿이 돌아왔다. 2010년대 초중반 이후, 명절 연휴는 '외국인 노래잔치'나 '연예인 권투대회' 같은 특선 쇼 예능에서 다양한 기획을 선보이며 정규 편성을 기대하는 테스트 베드의 장으로 전환됐다. 미국 방송 시스템처럼 '파일럿'이란 단어와 개념이 우리에게도 일상화됐고, 그렇게 탄생한 프로그램들을 어림잡아 줄을 세워 봐도 2010년 <아육대>, 2013년 <나 혼자 산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5년 <복면가왕>, <마리텔>, <불타는 청춘>, 2018년 <옥탑방의 문제아들> 2019년 <만남의 광장> 등이 있다.

그러나 지난해 추석부터, 큰 적자와 매체간의 경쟁으로 위축된 방송가의 분위기 속에 파일럿이 실종됐다. 그 자리는 '무슨 특집'으로 명명된 하이라이트 편집본이 메웠다. 이 달갑지 않은 추세는 이번 추석에 다양한 파일럿 예능들이 쏟아져 나오며 한풀 꺾였다. 예능 시청자 입장에서 다행이고 반가운 반전이다. 그런데 외출을 자제하게 된 이번 추석에 한두 편씩 찾아보면서 그림자는 한층 더 짙게 드리워졌다. 트렌드로든, 하나의 콘텐츠로든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29%의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KBS2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비롯한 트로트 콘텐츠, tvN <올인>, MBN <로또싱어>, SBS <방콕떼창단> 등 게임과 추리 요소를 겸비한 가창 예능, KBS <전교 톱10>, <TV라떼는>과 같은 복고 콘셉트까지 중장년층에게 포커스를 맞춘 주된 흐름은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겠다. 문제는 그 밖에서 신선한 흐름이나 시도가 있어야 할 텐데, 마치 시상식장에 동일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배우들처럼 기획이나 콘셉트가 겹치거나 유사한 프로그램이 바로 떠오른다.

KBS의 <랜선장터–보는 날이 장날>은 지역 경제에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지역 농어민들과 힘을 합쳐 우수한 특산물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프로그램이다. 방송의 힘을 사회적 환원에 활용한다는 선한 영향력부터 풀어나가는 방식까지 백종원의 <맛남의 광장>과 유사하다. 선한 영향력은 동네 분식집을 위한 최고의 라면 레시피를 개발하는 SBS <대국민 공유 레시피, 라면 당기는 시간>에서도 중요한 포인트로 등장한다. 라면에 초점을 맞춘 것을 제거해보면 <골목식당>과 같은 프레임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곳곳에 숨어있는 기발한 라면 레시피를 찾는 MBC 추석 특선 예능 <볼빨간 라면연구소>와 소재가 겹친다. 기획 뿐 아니라 MC진의 구성과 구도, 전국을 다니며 레시피를 찾는 과정과 보상체계까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코로나, 언택트, 집콕, 라면으로 이어지는 연상 작용은 편의점 음식 레시피를 주제로 '혼밥러'들을 위한 추석 특별판 MBC <백파더 편의점 디너쇼>와 이어진다. 마치 제작진이 기획의 풀을 공유한 것 같다.

SBS <랜선 집들이 전쟁-홈스타워즈> 또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기획이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셀프리모델링 열풍을 타고 만들어진 인테리어 프로그램들이 유행 따라 반짝하다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일상성이 다시금 화두가 되면서 공간에 대한 관심은 정리, 부동산 등 일상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그런데 <홈스타워즈>는 누군가의 삶의 공간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있지만, 타인의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이 예전 셀프리모델링 시대의 '보여주기식' 인테리어 예능에서 진일보한 구석이 없다. 게다가 팀을 나눠 소개할 공간의 이름을 짓고 승패를 가르는 방식이 MBC <구해줘 홈즈>와 유사하고 욕망을 건드리는 차원이 다르다보니 편성시간의 불리함까지 겹쳐 1.5%라는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외에도 SBS는 모바일 콘텐츠 <제시의 숏!터뷰>, 인기 유튜브채널 <문명특급>의 '숨어 듣는 명곡'을 '숨듣명 콘서트'로 확대해 TV특별판으로 제작하는 시도를 했으나 방송 콘텐츠화하는 과정에서 특유의 생생한 맛은 감퇴됐다. 웹 콘텐츠를 이런 식의 방송문법에 맞춘 변환으로는 시청률로나 화제성으로나 매체를 넘나드는 가능성 측면에서나 유의미한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됐다.

지금 카카오TV가 런칭해 모바일 콘텐츠에 대한 실험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고, 또 한쪽에선 이제 플랫폼, 숏폼이란 단어가 옛말이 될 정도로 진화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어떤 시대보다 매체와 콘텐츠를 제공하는 기기와 연결되어 생활하고,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기본인 1020세대는 항상 무언가를 보고 있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에 특히 지상파에서 준비한 예능들은 이런 시대 및 세대와 조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 노골적으로 나아가는 중장년층 타겟팅 이외에 다른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언택트나 선한 영향력에 집중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상상력, 예산의 부재와 부실이 이번 연휴 파일럿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KBS,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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