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에겐 엄정화가 있었다

김상화 입력 2020. 9. 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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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엔터테이너이자 패션 아이콘.. '환불원정대' 통해 건재함 과시

[김상화 기자]

 영화 '오케이!마담'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지금이야 가수와 배우를 겸하는 연예인들이 흔하지만 과거엔 손으로 꼽을 만큼 소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무렵만 하더라도 다른 분야 활동에 대한 색안경이 존재했었고 '하나만 잘해라'식의 냉소적인 반응도 적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1990년대부터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이틴 스타로 출발했던 김민종, 손지창을 비롯해서 임창정 등은 가수와 연기를 겸업해 주목받았고 이들의 성공을 두고 '멀티 엔터테인먼트'라는 호칭이 뒤따랐다. 

그중에서 엄정화의 등장은 제법 흥미로웠다. 연예계 데뷔 1년 만에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주연을 꿰찬데 이어 '눈동자'가 수록된 OST 격인 1집 음반을 동시에 내놓으면서 가수와 연기 활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시작했다.

비록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데뷔곡에 대한 반응도 뜨겁지는 않았지만, 당시 과감했던 그녀의 이 행보는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가수와 배우 양쪽 모두를 석권한 모범사례로 엄정화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감히 흉내내기조차 힘든 파격적인 의상도 거뜬히 소화해낼 만큼, 엄정화는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아이콘'이기도 했다. 

1990년대 가요계를 빛낸 스타
 
 지난 12일 방영된 MBC '놀면 뭐하니?'의 한 장면
ⓒ MBC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오케이 마담> 홍보를 위해 출연한 SBS <집사부일체>를 제외하면 예능 나들이가 오랫동안 뜸했던 '한국의 마돈나'는 MBC <놀면 뭐하니?> 환불원정대 편의 고정 멤버로 선택되면서 전례 없는 예능 활동에 돌입했다.  

특히 '환불원정대' 지난 12일 방송분 중 30~40분가량이 엄정화 중심으로 꾸며진 가운데, 예전 가수 활동을 간략히 회고해보는 시간도 마련됐다. 장시간의 특집 방송은 아니었지만 '눈동자'(1993년)부터 '디스코'(2008년)에 이르는 인기곡들의 등장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 시절 인기 가수의 위상을 다시금 피부로 체감할 수 있게 했다. 

고 신해철이 프로듀싱을 맡았던 엄정화의 데뷔곡 '눈동자'는 '재즈 카페'(1991년)의 연장선상 격에 놓인 세련된 사운드 구성으로 눈길을 모았다. 엄정화는 2년 후 발표한 2집 '하늘만 허락한 사랑'(김형석 작곡)이 당시 지상파 가요프로 상위권에 오르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착실히 다져 나갔다. 이어진 1997년부터 3년에 걸친 기간은 가수 엄정화가 절정의 인기를 과시한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엄정화는 1990년대 한국 댄스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작곡가 주영훈과 손잡고 만든 '배반의 장미'로 방송 3사 1위, 연말 가요대상 본상 수상을 휩쓰는 등 솔로 여가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지누션의 '말해줘' 피처링 참여 역시 가수로서 그의 존재감을 더욱 더 각인시켰다. 또 다른 주영훈 작품인 4집 타이틀곡 '포이즌'은 1998년 한해를 뜨겁게 달군 곡으로 평가된다. 국내 댄스클럽을 비롯해서 KBS <전국노래자랑> <캠퍼스 영상가요> 등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 각급 학교 장기 자랑 대회에선 어김없이 이 노래가 울려퍼졌다.  

2000년대 일렉트로니카 음악으로의 변신...그리고 공백기
 
 지난 12일 방영된 MBC '놀면 뭐하니?'의 한 장면
ⓒ MBC
 
같은 음반의 후속곡으로 등장한 '초대'(박진영 작곡)는 관능적인 면을 극대화시키면서 엄정화 전성기를 화려하게 수 놓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999년에도 세기말 테크노적인 요소를 담은 '몰라'(김창환 작곡), 여름 단골 애청곡 '페스티벌'을 발표하며 뜨거운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2000년대 이후론 연기 비중을 늘리면서 변화를 모색했다. 

비록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윤상, 달파란, 정재형, 롤러코스터 등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을 구사하는 이들을 대거 끌어들인 솔로 7집 < Self Control >, 캐스커와 W, 지누, 방시혁 등이 참여한 8집 < Prestige >를 통해선 한국적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시도했고 그 결과 한국대중음악상(일렉트로닉/댄스부문) 수상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2008년 YG와 손잡고 내놓은 '디스코'로 모처럼 큰 사랑을 받았지만 이후 갑상샘 암 투병에 따른 성대 이상을 겪으면서 10집 < The Cloud Dream of the Nine >(2016~2017년 총 2부작 구성)으로 돌아오기까지 8년 이상의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다. 이 시기 '연기자' 엄정화로선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지만 '가수 엄정화'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영원한 우리들의 우상
 
 지난 12일 방영된 MBC '놀면 뭐하니?'의 한 장면
ⓒ MBC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 관객은 하나 둘 퇴장하고
너와 나의 크레딧만 남아서 / 새까만 프레임을 가득 채워
또 다른 영화는 시작됐고 / 관객은 하나 둘 입장하고
너와 나의 추억만 남아서 / 위로 날 위로해..." ('Ending Credit' 중에서)

양질의 내용물로 채워졌던 10집 수록곡 'Ending Credit'은 마치 지난 25년에 걸친 가수 활동을 정리하는 듯한 가사(행주, 프라이머리 작사)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누군가는 "작별 인사 같은 작품"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누군가 올라섰던 영광의 자리가 새롭게 등장하는 스타들의 몫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순리다.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고 엄정화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음악을 듣고 환호했던 팬들도 이젠 세월의 흐름 따라 나이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난 몇 주 전까지는.  

비록 이효리가 별 뜻 없이 내던진 말로 인해 시작된 '환불원정대'지만, 덕분에 우리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가요계의 언니이자 누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비록 음악방송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춤솜씨를 보여준 엄정화는 안방에서 TV를 시청하던 3040 세대에겐 반가움을 넘어선 울컥함을 동시에 선사했다.  

22년 전 일명 'V맨'으로 그녀의 곁에 늘 존재했던 김종민의 깜짝 등장은 이러한 감정에 제대로 불을 지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노래로 '포이즌'을 선택했던 학생, 아침 기상을 할 때마다 '페스티벌'을 들으며 식당으로 향했던 군인, 시대를 앞서갔던 패션과 메이크업을 따라했던 그 시절 젊은이들은 두 사람의 재회를 바라보며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시가 건넨 "언니는 You are 영원해"라는 말은 분명 문법상 맞지 않은 표현이지만 지금의 엄정화에게 딱 어울리는 찬사다. 그때 우리들에겐 엄정화가 있었다. 그리고 2020년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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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azzkid 에도 수록되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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