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남산의 부장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박창영 2020. 1. 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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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40일 다룬 이야기
'대부'식 누아르 물로 풀어내
'내부자들' 우민호 연출과
이병헌의 '김재규' 연기 조화
경호실장(왼쪽)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등에 업고 김 부장의 자존심을 뭉갠다. [사진 제공 = 쇼박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부마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언한다. 원작 논픽션에도 들어 있는 이 발언은 유신정권이 붕괴한 주요 이유를 암시한다. '정권을 수호한다'는 목표에 정신이 팔려 민주주의와 국가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을 잊은 것이다.

이야기는 김 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이 발생하기 40일 전부터 시작된다. 미국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김형욱의 극 중 이름)이 유신정권 실체를 폭로하며 파란을 일으킨다. 현 중앙정보부장 김규평(김재규)은 정권 최대 위기가 될지도 모를 이 일을 수습해야 해서 골치가 아픈데, 임무에 온전히 집중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이 경호실장 곽상천(차지철)을 아끼게 된 이후로 자신은 눈 밖에 난 것 같아서다. 한술 더 떠 곽 실장은 총애받는 자신의 위치를 악용해 노골적으로 김 부장을 무시한다.

이미 결말을 다 아는 실화를 다루는데도 시선을 붙들어 매는 힘이 있다. 연출자 우민호 감독의 능력이다. 기업과 정치권, 언론의 뒷거래를 다룬 '내부자들'로 크게 주목받은 그는 '마약왕'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외면당하며 영화팬들에게 하나의 의문부호를 남겼다. 과연 '내부자들'과 '마약왕' 중 어느 쪽이 그의 실력이었을까. '남산의 부장들'은 우 감독 연출력이 '내부자들'의 그것이었다고 못 박음과 동시에 신뢰할 만한 한국 누아르 감독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병헌은 '각하'의 한마디에 충정과 배신감을 오가는 김 부장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달콤한 인생' 선우를 연기하면서 보여줬던 것처럼 흔들리는 눈빛과 손아귀의 움직임만으로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남산의 부장들'을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 김재규를 이병헌 얼굴로 기억할 것이다. 이 밖에도 박 대통령 역의 이성민, 박용각 전 부장으로 분한 곽도원, 곽 실장으로 나온 이희준까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

시의성이 다소 아쉽다고 평가할 시선도 있을 것이다. 10·26 사건을 담은 이 영화가 지난 정권에서 개봉했더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이다. 관객은 금기를 건드리는 이야기꾼에게 언제나 열광해왔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러나 결코 뒷북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이 영화가 특정 인물의 뒷모습을 통해 보편적 인간 군상을 그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꼬집는 절대권력의 문제점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않았던 1960~1970년대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어느 권력자라도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해서 다뤘다. 바로 정권과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오만의 덫이다.

1993년 출간된 동명 논픽션은 한일 양국에서 52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원작이 해석 대신 팩트 위주로 긴장감을 자아냈다면 영화판은 구구절절한 대사보단 명암 대비를 극대화한 미장센으로 시대의 냉혹한 분위기를 담았다. 감독은 원작을 읽고 한국판 '대부'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한다. 총 제작비 208억원에 손익분기점은 500만명이다. 15세 관람가, 22일 개봉.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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