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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 라미란의 첫 주연작 '걸캅스', 기념비적인 이유

황진미 입력 2019.05.16. 15:31 수정 2019.05.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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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캅스'가 젠더 이분법을 취해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걸캅스>가 매우 시의적절하고 기념비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개봉 전부터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악평이 잇달았던 것도 어쩌면 이해가 간다. 그들도 느끼는 것이다. 지금 발밑의 얼음이 깨지고 있다는 것을. 그 두려움의 전조를.

◆ ‘버닝썬 게이트’에 대한 예지몽

<걸캅스>는 올해 터진 ‘버닝썬 게이트’에 대한 예지몽 같은 영화이다. 지난해에 촬영한 영화이고, 훨씬 전부터 기획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별로 놀랍지도 않다.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공론화가 시작된 것이 2015년이고, 지난해에는 여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경찰 편파수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지 않았던가.

2015년에 소라넷에서 성폭력 작당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성들이 폭로하기 전까지, 소라넷은 1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사이트일 뿐이었다. 경찰은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폐쇄가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였고, 남성 식자들은 “소라넷이 폐쇄되면 더 많은 유사사이트들이 생겨날 것” 이라며 짐짓 아는 척을 했다. 죄의식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으며 심지어 ‘볼 권리’를 주장하는 뻔뻔한 남자들과 싸운 덕에, 2015년 12월 드디어 소라넷이 폐쇄됐다. 전담 수사 테스크포스가 창설된 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후 디지털 성폭력은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불법촬영은 ‘몰카’, ‘리벤지 포르노’ 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범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식이 밴드’는 동영상 속에서 헤어진 여자 친구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기연민에 빠져드는 남자의 정서를 노래했다. 동영상 속 여성들이 자살을 하면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팔렸다. 경찰 역시 불법촬영을 풍속을 어지럽히는 음란한 행위로 다룰 뿐, 피해자가 뚜렷이 존재하는 범죄로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여성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 문제를 처음 TV에서 다룬 프로그램은 2016년에 방영된 <SBS 스페셜-‘몰카 천국 대한민국> 이었다. 광범위하게 퍼진 불법 촬영물의 실태를 고발하였지만, 여전히 ‘개탄스러운 성풍속’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한계를 지녔다. 2017년에 젠더토크쇼 <까칠남녀>와 <뜨거운 사이다>에서 디지털 성폭력으로 다루었던 것에 이어서, 2018년에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웹하드 불법 동영상의 진실>은 피해여성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불법촬영을 둘러싼 거대한 산업의 실체를 파헤쳐 주었다. 요컨대 찍는 자, 올리는 자, 보는 자가 유기적으로 맞물린 구조일 뿐 아니라, 웹 하드 업체와 필터링 업체, 디지털 장의사 업체 등이 모두 유착된 채 형성된 ‘IT 강국’ 대한민국의 ‘창조 경제’ 임을 적나라하게 누설했다.

드라마 <마녀의 법정>, <파이터 최강순>, 영화 <나를 기억해> 등 이 문제를 다룬 작품도 속속 만들어졌다. <걸캅스>는 이러한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이자, 그 결정판이다.

◆ 남성 경찰들이 방기한 사건을 해결하다

경찰서 민원실에 피해 신고를 하러 온 여성이 쭈뼛거리다 나가 차에 뛰어든다. 갓 스무 살의 여성이 클럽에 놀러 갔다가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음란 사이트에서는 조회 수 낚시질을 해가며 동영상 유출을 경고한 상태지만, 경찰들은 이를 막으려 나서지 않는다. 영화 <걸캅스>는 민원실의 여성 경찰들이 힘을 합쳐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범인들은 약물로 여성들을 쓰러뜨리고, 성폭행 장면을 불법 촬영하여 자신들이 운영하는 음란사이트에 올려 다운로드 장사를 하고, 사이트를 통해 유입되는 회원들에게 약물을 팔아 부수입을 올린다. <걸캅스>는 범죄의 얼개와 더불어 남성 경찰의 대응도 잘 보여준다. “자기들끼리 좋아서 한 것” 이라며 강간임을 입증하기 힘들다고 판단해버리거나, 음란물유포에 대해서도 실적에 도움 안 되는 잡스러운 사건으로 치부해버린다.

반면 박미영(라미란)과 조지혜(이성경)은 피해여성이 삶을 포기할 정도로 고통과 절망에 시달린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한다. 영화 <걸캅스>는 두 번의 일장연설을 들려준다. 박미영은 피해여성들이 스스로를 탓하며 숨고 자살한다며 이런 풍토를 바꾸기 위해 반드시 범인을 잡겠노라 힘주어 다짐한다. 조지혜는 실적과 승진에 열을 올리는 남성경찰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경찰 본연의 임무를 일깨운다. 이처럼 영화는 경찰이 젠더에 따라 사건을 다르게 체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혹자는 범인이 시시한 악당이어서 재미가 반감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주제를 놓친 비판이다. 주인공들이 남성경찰들도 잡지 못하는 범인을 잡아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경찰들이 방기한 사건을 해결하는데 의미가 있다. 엄청난 권력을 지닌 악당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대단치 않은 범죄자와 수많은 이들의 동조와 무관심으로 인해 인격살해를 당한 누군가는 죽는다. 영화는 이러한 디지털 성폭력의 메커니즘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 여성 경찰 버디물

<걸캅스>는 남성 버디물이 홍수를 이룬 한국 영화계에서 캐스팅을 여성으로 바꾸어 신선함과 의미를 드높인 영화이다. 사실 장르로 굳어졌거나 검증된 작품의 캐스팅을 여성으로 바꾸어서 신선함과 시대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이미 시도되고 있다. <고스트 버스터즈> <오션스 8> <캡틴 마블> 등이 그것이다. 한편 멜리사 맥카시 주연의 <스파이>는 첩보액션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양의 주인공을 통해 성공적인 패러디이자 편견을 깨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국내 영화계에서도 이런 시도들이 존재한다. 멀리는 <조폭 마누라>에서부터 근래의 <차이나타운>이나 <마녀>의 경우, 기존 장르의 문법을 그대로 둔 채 남성들의 배역을 여성으로 치환하였다. 남성적인 질서와 욕망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젠더만 바뀌었을 때 벌어지는 모순들이 일종의 미러링처럼 기이하게 돌출되기도 하지만, 나름 흥미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걸캅스>는 형사 버디물을 여성으로 캐스팅해 찍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치명적인 범죄에 남성 경찰은 도움을 주지 못하였지만, 여성 경찰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해결한다는 목적론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가령 여성 경찰들을 등장시켜 남성 경찰들과 똑같이 서열과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암투에 몰입하는 서사를 그렸다면, 남성적 질서와 욕망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젠더만 뒤집힌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걸캅스>는 남성(중심적인 조직)이 돕지 못하는 여성을 여성이 돕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성 경찰의 존재이유와 여성 서사의 존재 이유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다.

◆ 최상의 캐스팅

라미란, 이성경, 최수영의 캐스팅 조합도 칭찬할만하다. 중년의 베테랑 경찰과 젊고 의욕 넘치지만 피지컬이 다소 약한 인물, 그리고 천재 해커의 조합은 <투캅스> 보다는 최근작 <탐정 : 리턴즈>의 조합을 연상시킨다.

<걸캅스>는 라미란의 첫 주연 작이라는 점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라미란은 경력 20년 된 44세의 배우이다. 출산으로 경력 단절을 겪은 뒤 영화에 데뷔하여 48편의 작품에 단역과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이처럼 단역과 조연을 하다가 점차 연기력을 인정받아 주연을 맡게 되는 사례가 남배우들 중에서는 간간히 있었지만, 여배우들 사이에서는 최초이다. 오히려 20대에 주연을 했던 여배우들도 중년이 될수록 조연으로 밀리거나 아예 배역을 맡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라미란의 사례는 기념할만하다. 특히 우연히 캐스팅된 것이 아니라, 전작 <소원>의 제작사 대표가 라미란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오랫동안 개발한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이성경의 캐스팅도 대단히 어울린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렙> <역도요정 김복주>, 영화 <레슬러>를 통해 흐릿한 눈빛에 살짝 ‘돌아이’ 기질이 감도는 싱겁고 엉뚱하며 뒤끝 없는 인물의 이미지가 구축되었는데, 이는 캐릭터 코미디에 매우 걸맞은 이미지이다.

최수영은 걸그룹 출신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선보이며 경력을 쌓아왔는데, 연기 역시 찰지다. 그가 연기한 여성 해커는 나름의 전사를 지닌 인물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동안 여성해커는 할리우드 영화 <네트><분노의 질주-더 세븐><분노의 질주-더 익스트림><오션스8><거미줄에 걸린 소녀> 등에 등장하였으며, 한국에서도 드라마 <힐러>의 김미경이 분한 아줌마 해커, 영화 <조작된 도시>의 심은경이 분한 히키코모리 해커, 웹드라마 <내일부터 우리는>의 설록 등이 있다. <걸캅스>의 여성 해커는 한때 국정원에서 근무했으며 아이돌 덕질을 한다는 점에서 설록과 가장 유사한 설정이지만, 최수영은 자신만의 매력으로 양장미 캐릭터를 구축했다.

영화는 개성 있는 세 여자가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뻔 한 좌절의 순간에 민원실장을 포함하여 교통과의 수많은 여성들이 합심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수많은 형사물에서 여성은 구색 맞추기로 한두 명 끼어있었고, 주로 사건의 피해자나 남자주인공의 가족으로 등장했던 것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처럼 사회의 각 자리에 속한 여성들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은 <걸스카우트>나 <육혈포 강도단>처럼 여성들의 사적 연대를 보여주는 영화들과는 또 다른 쾌감을 지닌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을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걸캅스> 속의 악당은 ‘일망타진’ 된다. <베테랑>이 연상되는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박미영은 자신의 레슬링 기술을 이용하여 악당을 시원하게 내리 꽂았다. 하지만 현실의 버닝썬 클럽의 일당들은 좀처럼 일망타진 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범인들은 단지 클럽의 VIP 손님들이었지만, 현실의 악당들은 클럽의 실소유자이자 경찰과는 끈끈한 유착이 되어 있는 탓이리라. 승리의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버닝선대인’, ‘버닝쑨대국밥집’ 같은 패러디만 난무하는 실정이다. 여전히 버닝썬 클럽에서 일어난 범죄들을 킬킬대고픈 추문으로 소비하거나 선망하고픈 욕망의 실현으로 사고하는 모양이다. <걸캅스>가 젠더 이분법을 취해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여, 고개를 들어 4개월째 표류하고 있는 ‘버닝썬 게이트’ 수사를 보라. 더 많은 여성 경찰과 더 많은 여성 간부가 필요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걸캅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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