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 그녀가 궁금하다

김지혜 기자 입력 2019. 2. 5. 11:09 수정 2019. 2. 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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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제25회 미국배우조합(SAG) 어워즈가 열린 가운데 ‘킬링 이브’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한국계 캐나다 배우 샌드라 오가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AFP=연합뉴스

“휴대폰으로 전송받은 대본을 아무리 훑어도 내가 맡은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어느 부분이 내 거야?’라고 물어야 했다.”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샌드라 오(48·한국명 오미주)는 BBC 아메리카의 TV드라마 <킬링 이브>의 대본을 처음 받아보던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휴대폰 너머 “(주인공) 이브가 당신이에요”라는 에이전트의 말을 들을 때, 그는 <킬링 이브>가 몰고 올 돌풍을 예감이나 했을까. 이 작품으로 그는 올해 골든글로브와 미국 방송영화비평가협회 ‘크리틱스 초이스’, 미국배우조합이 수여하는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샌드라 오는 이날의 기억을 자주 떠올린다. 그는 “내가 인종차별을 얼마나 내면화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면서 “나 스스로도 중요 배역을 맡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오랜시간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도록 강요 당하면 그렇게 된다. 세뇌 당해온 것이다”라고 지난해 4월 미국 연예매체 벌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샌드라 오는 연기 인생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복잡하고 다층적인 내면을 가진, 주인공 ‘이브’를 맡게 됐다. 아시아계, 특히 여성 배우로서 그가 마주해야 했던 차별의 장벽은 이토록 거대했다.

한 누리꾼은 그의 수상 소식에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장애물을 직시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극찬했다. 그가 할리우드 최고의 자리에 서는 여정은 곧,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싸워나가는 과정 자체였을 테다.

지난달 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버리힐스의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킬링이브’로 아시아계 최초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한국계 캐나다 배우 샌드라 오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베벌리힐스 AP/NBC=연합뉴스

■“가족 중에서 석사 학위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샌드라 오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교회와 골프로 가득한, 매우 매우 전형적인 한국식 가정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지난해 영국 잡지 <더 젠틀우먼>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1971년생인 그는 한국에서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건너온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는 자식들이 학업에 힘써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을 갖길 희망하는 전형적인 한인 부모였다.

그런데 샌드라 오의 ‘안짱 다리’가 뜻밖의 ‘샛길’이 됐다. 어머니가 다리를 고쳐보겠다고 그를 발레 교실에 보낸 것이다. 대단한 소질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 그만두긴 했지만, 샌드라 오는 발레를 통해 자신의 활동적인 에너지를 표출하는 법을 알게 됐다. 이는 곧 연기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11~12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그는 결국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캐나다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했다.

과거 샌드라 오는 한 인터뷰에서 “가족 중 석사 학위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 그의 언니는 현재 검사, 남동생은 유전학자로 일하고 있다. 북미에 퍼진 ‘아시아 출신은 공부를 잘한다’는 편견에 대체로 부합하는 가족의 모양새다. 샌드라 오는 가족 안에서부터 공고하게 자라난 인종 편견과 홀로 싸우고 있었던 셈이다.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조이 럭 클럽>(1994) 포스터

■<조이 럭 클럽> 이후의 샌드라 오…‘이민자 서사에 감동’

샌드라 오가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캐나다 TV영화 <에블린 라우의 일기>에서 주연을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작은 배역을 맡았던 중국계 캐나다인 미나 슘과 조우하게 된다. 영화 감독이었던 미나 슘은 촬영 현장에서 샌드라 오의 연기를 보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만들고 있는 영화 <더블 해피니스>(1996)에 그를 주연으로 캐스팅한다. 중국계 캐나다인 가족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조이 럭 클럽>(1994)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샌드라는 두 사람이 함께 <조이 럭 클럽>을 보러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네 명의 중국 출신 이민 여성과, 그들이 미국에 정착해 낳은 딸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보고 샌드라 오는 “매우 떨면서 울었다”고 말했다. 미나 슘 역시 “우리가 온 곳, 우리의 삶이 담긴 영화를 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라면서 “영화 속 (이민자) 여성들의 강인한 모습을 보면서, 샌드라와 나는 미래를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우리가 함께 할 작업이 어떤 울림을 될지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두 사람이 흘린 눈물에는 이민자 서사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그 속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에 대한 감동 그리고 결의가 담겨있었다.

이후 샌드라 오에게 세계적인 인기를 가져다준 작품은 2005년 시작한 인기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다. 샌드라 오는 이 드라마에서 외과의사 크리스티나 양을 연기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10년간 무려 5번이나 에미상 여우조연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2006년 골든글로브와 미국배우조합 여우조연상, 에미상 최우수배역상을 받는 성취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즈음 <그레이 아나토미> 출연진들은 날로 치솟는 인기 속에서 하루 15~17시간, 1년에 10개월 동안 이 작품에만 전념했는데 그 중에서도 샌드라 오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배우로 명성을 얻었다. 동료 배우들은 그의 근면함에 감탄하면서, 대본을 도배한 그의 포스트잇을 보고 농담을 칠 정도였다.

미국 ABC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한 장면. 샌드라 오는 이 작품에서 의사 크리스티나 양을 연기했다.

■“인종차별은 존재한다”

이처럼 그가 유독 노력하는 배우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샌드라 오는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나는 다행히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일해왔다. 그런데 나와 같은 (아시아계) 형제·자매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인종차별은 존재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샌드라 오 이전 아시아계 여성이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무려 38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쇼군>의 시마다 요코 이후 4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소식이 없었다. 이처럼 아시아계 배우가 할리우드 영화·드라마에 출연해 주요한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출연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학·대중문화 전문가 낸시 왕 유엔은 2017년 보고서를 통해 2015~2016년 미국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의 64%에는 아시아 혹은 태평양 섬 출신이 아예 출연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특히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프로그램의 전체 출연진 중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차지하는 비율은 단 2.6%에 불과하다고 했다. 영화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USC 애넌버그 언론대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2016년 할리우드에서 흥행 상위권을 차지한 100편의 영화 중 3분의 2에는 아시아계 배우가 출연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샌드라 오가 <킬링 이브>의 주연을 꿰차고, 골든글로브 등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샌드라 오는 자신이 이룩한 이 성취가 영화계가 만들어온 느린 진보의 결과에 힘입었다고 생각한다. 미국 내 유색 인종의 존재와 문화를 작품 위로 드러내려는 할리우드 내부 배우와 제작진들의 노력이 함께 일군 변화라는 것이다.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사회자를 맡은 그는 한 리포터에게 “할리우드는 분명 코웃음이 나는 곳이지만,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 <블랙 팬서>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보았는가? 이 영화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블랙팬서>는 국내에서도 크게 흥행한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로 흑인 배우와 그들의 문화를 전면에 내세워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부유한 아시아인들의 삶을 다룬 ‘막장 드라마’ 영화로 아시아 특유의 가족 중심적인 문화가 담겨 미국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두 작품 모두 유색 인종의 문화를 소재로, 유색 인종 배우들이 중심이 돼 만든 영화다.

■‘크리스티나 양’이 아닌 ‘이브’로…또 다른 격려가 되길

영국 BBC 아메리카가 제작해 지난해 4월8일부터 5월27일까지 방송한 8부작 드라마인 <킬링 이브>는 일과 사랑의 권태에 빠진 여성과 사이코패스 킬러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 동명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는 시즌1의 인기에 힘입어 현재 시즌2 제작이 진행되고 있다. 샌드라 오는 드라마에서 영국 정보국 MI5 소속의 이브 폴라스트리 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샌드라 오는 이브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다지고 있다. 그를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양으로만 기억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를 이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매체 옵저버는 “이브는 어려운 역할이다. 그는 완전히 평범해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며 동시에 매력적이어야 한다. 샌드라 오는 아주 쉽고 멋있게 이 임무를 완수해냈다”고 평했다. <킬링 이브> 시즌2에서 그는 얼마나 더 날아오를까.

샌드라 오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 배우조합 시상식에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유색 인종 배우 알프리 우다드, 제이미 폭스, 리나 웨이스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그들이 전해준 “우리는 같은 싸움을 하고 있어요” “멈추지 말고 계속해요” “당신은 이미 승리했어요” 등 따뜻한 격려의 말들이 샌드라 오를 지금의 자리에 서게 했다는 말이었다. 샌드라 오가 이룬 지금의 이 성취가 할리우드에서 설 곳을 잃고 방황하는 배우들에게 또 다른 격려가 되기를 바라본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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