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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50년]⑨너는 운명을 건 외로운 표범인 적 있는가

민경원 입력 2018. 05. 09. 02:00 수정 2018. 05. 09.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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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노래 베스트 11]
1985년 '킬리만자로의 표범'
독백 형식 읊조리는 가사에
함께 포효하며 열광한 청춘
2003년 8월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35주년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는 조용필. [중앙포토]
가수와 작곡ㆍ작사가의 합은 무척 중요하다. 특히나 조용필처럼 직접 곡을 만들어 불러온 싱어송라이터의 경우 자칫 잘못하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할 수 있는 탓이다. 1985년 발표된 8집을 함께 만든 김희갑 작곡가, 양인자 작사가와 조용필의 만남은 그야말로 ‘준비된 인연’이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에 이어 ‘바람이 전하는 말’, ‘내 가슴에 내리는 비’ 등 총 12곡 중 4곡을 함께 만들었다.

조용필은 “7집까지는 제가 곡을 많이 썼는데 워낙 바쁘다 보니 곡 쓸 시간조차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희갑씨는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래를 하고 싶다며 코냑 한 병을 사들고 왔다”고 만남의 순간을 기억했다. 여기에 양희자씨가 신춘문예에 떨어지면서 느꼈던 좌절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가사를 붙인 것이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조용필은 “두 분이 저로 인해 친해져서 부부가 됐다. 셋이서 함께 식사하다가 슬쩍 도망가기도 했다”며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12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시작되는 50주년 콘서트 투어 ‘땡스 투 유(Thanks To You)’를 앞두고 지난 2008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 시리즈를 디지털로 재구성했다. 당시 가수ㆍ평론가ㆍ소설가ㆍ시인ㆍ방송인 10명이 참여해 ‘조용필 노래 베스트’를 선정했다. 2008년 2월 26일 이문재 시인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대해 쓴 기고문이다.


21세기를 갈망했던 80년대 ‘청춘 노래’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대해
공통점이 있었다. 나이 차가 제법 나고, 고향도 학교도 달랐지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머리는 늘 더부룩하고, 수염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잘 깎지 않았으며, 눈빛은 늘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실어증 환자처럼 말이 없었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굼벵이처럼 게을러 터졌고, 돈이나 권력에는 무심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만큼은 달랐다. 누구보다 빨리 마시고 빨리 취했으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다. 한마디로 ‘바보’들이었다. 나와 똑 같은 바보들이 목이 터져라고, 허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부르는 노래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 노래는 노래방에서만 불렀다. 노래방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낯설기보다 불쾌한 것에 가까웠다. 노래방은 폭탄주 못지않게 반문화적으로 보였다. 나는 노래방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오래 간다 해도 나는 절대 안 가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예측은 빗나갔고, 각오는 무너졌다.

1985년 발매된 조용필 8집. 김희갑 작곡가, 양인자 작사가와 호흡을 맞췄다.
요즘은 문인들이 잘 모이지 않는 데다, 모인다 해도 ‘취향’과 연령대별로 모이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장르 불문, 나이 불문이었다. 그 무렵에는 이념까지 불문이었다. 인사동에서는 혼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들어갈 때는 혼자였지만, 나올 때는 늘 어깨동무였다. 노래방이 생기기 이전, 인사동 술집들은 모두 ‘라이브 무대’였다. 동인지 합평회든, 출판기념회든, 수상식 뒤풀이든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면 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ㆍ기자ㆍ출판인들은 모두 가수로 돌변했다.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인사동을 찾는 문인들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미풍양속’도 시들해졌다. 대신, 어쩌다 술자리가 있을 때는, 2차 3차는 노래방이었다. 나는 노래방이 불편했지만, 술기운으로 버텼다. 두꺼운 ‘책’을 뒤져 부르고 싶은 노래를 고르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사는 생각나는데,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나를 구해준 노래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구름에 살짝 가려져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탄자니아 북부의 킬리만자로. [중앙포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단연 청춘의 노래다. 가사에 담겨 있는 의미도 의미려니와, 당시 대중가요로서는 특이하게도 낭송과 노래가 교차하는 형식이었다. 제목부터 강한 흡인력이 있었다.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던 1980년대 후반, 나는 첫 시집도 내지 못한 무명 시인이었고, ‘조직의 쓴맛’이 뭔지 모르던 신입 사원이었다. 남편이나 가장의 역할 모델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신혼 시절이었다. 이십대 후반, 경계 위에 있던 때였다.
사회 혹은 시대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던 시절. 나는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하이에나가 될 수 없었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어야 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소월의 ‘초혼’의 화자가 떠오르곤 했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노래였던 것이다.
2006년 헌정공연 `순정한 작곡가 김희갑 음악회-그대, 커다란 나무`를 가졌던 작곡가 김희갑씨와 부인 양인자씨. 두 사람은 조용필 8집 작업을 함께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됐다. [중앙포토]
요즘은 노래방에 거의 가지 않을 뿐 아니라, 가더라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꿈도 꾸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가사가 나를 심문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는가, 불타는 영혼이 있는가, 21세기가 너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하이에나가 아닌가… 좋은 노래가 좋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좋은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렇지 않다. 표범과 하이에나가 다른 것만큼 달라져 있는 그 시절과 지금을 확인하게 한다.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포기한 또 다른 이유는 고음과 마지막의 ‘라~라~라~’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 순간, 내가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청춘의 노래다. 그런데 아직도 노래방에 가면 이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섬에 혼자 살며 시를 쓰는 함민복,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시인 강정, 삐딱한 아이들만 주인공으로 삼는 소설가 노희준. 이 아름다운 바보들아, 방심하지 마라. 너희들에게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못 부르게 될 날이 곧 들이닥치리니!

■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 대중 가요로서는 아주 색다른 곡이다. 어떤 장르의 곡이라기보다는 메시지송이다. 곡을 처음 접한 순간 청춘의 노래, 남자들의 노래라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젊을 때 갖는 끝없는 욕망을 담은 노래였다. 21세기를 앞두고 대망을 품었던 남자들은 모두 노랫말에 공감했을 것이다.

누구나 21세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노래를 자신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여자인 양인자씨의 마음에서 남성적인 가사가 나왔다는 게 놀랍다. 메시지송이기 때문에 힘줘 노래했다. 녹음할 때 긴 가사를 다 집어넣으려니, 힘들었다.

처음에는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팬들로부터 신청이 많이 들어와 부르게 됐다. 남성팬들은 콘서트에서 ‘꿈’과 함께 이 노래를
꼭 듣고 싶어한다.

내게 특별한 곡이기 때문에 올해 40주년 공연에서 이 노래를 마지막 곡으로 부른다.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함께 강한 다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 노래를 통해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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