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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 방송 이후 혐오가 나를 향했다"

입력 2018.01.22. 14:38

[한겨레21] EBS <까칠남녀> 중도 하차한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씨…
‘성소수자 특집’ 방송→ 극우단체 시위→ 하차 통보

은하선씨는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방송이 있은 뒤 ‘음란한 여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혐오가 강화돼 자신을 향했다고 말했다.

“내가 까칠한 게 아니야. 세상이 기울어진 거지.” 교육방송(EBS)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의 카피다. <까칠남녀>는 젠더 관점에서 기울어진 세상을 이슈별로 도마 위에 올려두고 까칠하게 따지는 프로그램이었다. 청소년 성적자기결정권, 자위, 데이트 강간, 여성 혐오, 낙태 등 논쟁적 이슈가 방송에서 깊이 있게 논의됐다.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성평등상을 받았다.

손아람·손희정 등 ‘녹화 거부’ 항의 표시

‘성평등 토크쇼’를 지향하는 <까칠남녀>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방식’으로 1년간 패널로 출연해온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씨의 하차를 급작스럽게 통보했다. 류재호 책임피디(CP)는 1월13일 은하선씨 하차를 결정하고, 프로그램 제작진을 통해 이 사실을 은하선씨에게 통보했다.

하차 통보의 출발은 지난해 말 방송된 ‘성소수자 특집’이었다. <까칠남녀>에서는 12월25일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LGBT를 의미하는 네 유형의 성소수자들이 출연해 자기 이야기를 했다. ‘어떤 고정관념도 없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방송 이후 사달이 났다. 반동성애를 기치로 모인 극우 성향의 기독교 단체, 학부모 단체 등이 EBS 사옥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은하선씨가 ‘제작진의 번호가 바뀌었다. 항의는 이 번호로 하라’며 퀴어문화축제 후원번호를 남긴 것에 대해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는 은씨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그리고 EBS에 민원을 제기했다. 2016년 1월, 은하선씨가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십자가형 딜도 사진을 찾아내 역시 교육방송에 민원을 제기했다.

은하선씨의 하차 이유에 대해 EBS는 1월17일 “제보된 민원 2건을 검토한 결과 은하선씨가 공영방송인 EBS 출연자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담당 CP의 최종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다. 은하선씨 하차는 성소수자 방송에 대한 반대 시위와 무관하며 성소수자 탄압이나 정치적 탄압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손희정·손아람·이현재 등 <까칠남녀> 기존 패널 3명은 “(은하선씨 하차 결정은) 성소수자의 입을 막아 존재를 지우겠다는 반동성애 집단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며 프로그램 녹화 보이콧을 선언한 상태다. 그로 인해 1월17일 예정된 <까칠남녀> 마지막 녹화는 취소됐다.

EBS 홍보담당자는 1월19일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은하선씨 하차는 류재호 CP의 결정이지만, 회사 공식 입장도 그 결정과 같다. 은하선씨 하차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말했다. <까칠남녀> 제작진은 마지막 녹화를 앞두고 패널 7명 가운데 1명 하차, 3명 녹화 거부라는 상황을 맞아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은하선씨를 1월18일 만났다.

‘방송에서 하차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게 1월13일이다. 달력을 보니 토요일이더라.

토요일 오전, <까칠남녀> 제작진이 연락했다. 오후에 시간이 가능해 밤 9시에 만났다. 제작진이 거의 다 나를 만나러 왔다. 이 많은 사람이 나를 만나러?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차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위에서 결정이 내려왔는데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제작진은 금요일 밤 12시에 ‘은하선을 하차시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공식적인 결정을 하고 전달하기에 이상한 시간이다. 처음엔 구체적인 ‘결격 사유’는 듣지 못했다. 나의 하차를 결정했다는 류재호 CP와는 만난 적도, 통화를 한 적도 없다.

“EBS로부터 사과받고 싶다”

교육방송(EBS)이 “은하선씨의 하차는 성소수자 탄압이 아니다”라는 공식 입장을 냈다.

이 모든 사건이 ‘성소수자 특집’ 방송 뒤에 일어났다. <까칠남녀>는 여러 젠더 이슈를 다루면서 지지도 많이 받았지만 ‘교육방송에서 콘돔이 웬 말이냐’ ‘남혐 방송이다’ 같은 왜곡된 비난도 많이 받았다. ‘양성애자’로 내 이야기를 한 ‘LGBT 방송’ 이후 나에 대한 공격이 훨씬 심각해졌다. ‘남자랑도 하고 여자랑도 하는 부도덕한 여자’라는 ‘음란한 여자’ 프레임이 씌워졌다. 내가 쓴 책 <이기적 섹스>에서 ‘섹스’ 행위 부분만 발췌하고, 내가 하지도 않은 자위 관련 말들을 한 것처럼 왜곡했다. 이 모든 공격의 주체는 반동성애 단체들이다. EBS가 이야기한 그 민원들도 결국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세력’이 제기한 것이다. 동성애 혐오에서 시작된 민원으로 나를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지난해 3월 첫 방송부터 출연했다. 프로그램 녹화 과정은 어땠나.

제작진이 정말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프로그램을 만든다. 방송을 만드는 1년 동안 즐거웠다. 매회 방송 주제와 관련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공부하면서 방송했다. 나도 많이 배웠다. 한 번도 브래지어를 안 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노브라’ 편에서 브래지어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인식하게 됐다. 무엇보다 ‘성소수자 특집’ 편을 찍으면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즐거웠다. 최근 전북 완주 경로당에 가서 할머니들의 ‘페미니즘’을 들었다. 할머니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모르시지만 살아오면서 겪은 인생 경험 자체가 페미니즘이다.

프로그램에 애정이 많은 것 같다. 처음 하차 통보를 받았을 때는 어땠나.

처음에 화가 난 건 뭐였냐면, 지난 1년간 함께했던 패널들과 인사하며 예쁘게 마무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열심히 했고 패널들과도 ‘케미’가 좋았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은 소박한 꿈이 좌절돼서 화가 났다. 지금은 EBS로부터 제대로 사과받고 싶다. EBS가 낸 공식 입장은 ‘제기된 민원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나를 사기범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글을 올리던 당시는,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이 방송되기 전부터 제작진에 ‘방송 중단’ 압력, 동성애 혐오가 빗발치던 때였다. 그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자 풍자로, 제작진 번호로 퀴어문화축제 후원번호를 적은 것이었다. 검찰이 기소한 것도 아니고, 한 보수단체가 고소장을 접수한 걸 두고 ‘사실로 확인됐다’고 방송사가 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기회 되면 장애여성 이야기하고파”

<까칠남녀>가 계속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아직 다루지 못한 무궁무진한 이슈들이 있다. <까칠남녀>에 장애여성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비장애여성 중심의 이야기였다. 장애여성, 이주여성의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가부장제도의 문제도 전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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