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장근석 "양화대교는 내 얘기..가난했고 미친듯이 살았다"①

입력 2016.01.10. 09:51 수정 2016.01.1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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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어린시절 연예계 활동 시작해 한류스타로 우뚝 지난해 탈세논란으로 해외활동 주력.."2016년 국내에서 가열차게 뛸 것"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올해는 국내에서 정말 가열차게 활동할 겁니다. 한류스타도 국내의 기반이 없으면 공허하죠. 배우로서 다시 국내에서 인정받고 싶어요."

장근석이 돌아온다.

우리나이로 올해 서른이 된 그는 상반기 중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에게 인사할 예정이다. 그의 드라마 출연은 2013년 '예쁜 남자' 이후 3년 만이다. 아울러 국내 활동 역시 3년 만에 재개하게 된다.

애초 그는 지난해 1월 tvN '삼시세끼 어촌편'을 통해 자연인 장근석의 매력을 보여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촬영까지 다 해놓고 방송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터진 '탈세논란'으로 그는 2015년 국내 활동을 접어야했다.

할 말은 많아보였지만 입을 닫은 채 자신을 향해 쏟아진 손가락질과 비난을 견뎌낸 그는 서른을 앞두고 혹독하게 통과의례를 거친 듯 했다.

2016년을 맞아 새롭게 각오를 다진, 30대로 접어든 장근석을 최근 만났다.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달려야했던 꽃미남 소년은 한류스타가 됐지만, 이후 방황도 했고 이런저런 뭇매도 맞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섰다.

다음은 장근석과의 일문일답.

--지난 1년 어떻게 지냈나.

▲학교 열심히 다녔다.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이고 이제 2학기 남았다. 쉬지 않고 올해까지 해서 마치려고 한다.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단편영화 4편을 찍었고 동료 학생들과 많이 어울렸다. 또 일본 등 해외에서도 부지런히 활동했다.

--지난해 1월 탈세논란이 있었다.

▲기사가 터졌을 때 일본에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하고 싶은데 탈세를 했다는 게 아니라 '논란'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당황했고 속상했다. 순식간에 나는 '탈세범'이 되더라. 3주 동안 휴대전화도 끄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만 다녔다. 일본에서도 산에 들어가 있었다.

(지난해 장근석은 논란이 불거진 나흘 뒤 자신의 팬카페에 "이유가 어찌됐건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지고 그 논란의 중심에 제 이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과 드리고 싶다. 불과 며칠 전에 2015년은 정말 열심히 달려보자라고 글을 올렸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돼 난감하기도 하고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는 글을 올렸다.)

지금껏 주식을 하지도 않았고 투기를 하지도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었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논란이 벌어져 많이 속상했다.

--돈을 많이 벌었나.

▲많이 벌었다. 그런데 내 수중에는 없다. 다 어머니가 관리하신다. 열심히 벌었고 많이 벌었다. 그래서 이제는 돈을 좇지는 않는다. 그런 욕심은 없다. 좀 더 큰 욕심을 내려고 한다. 우선 내 이름을 딴 재단을 올해 만들거다. 5년전부터 준비해왔다. 좀더 체계적으로, 좀 더 폭넓게 나눔을 실천할 거다. 연기 트레이닝센터를 만들어 후배도 양성할 거고, 에이전트도 세워서 신예들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선배들도 다 챙기고 싶다. 생활이 어려운 배우들이 많다.

--기부는 쭉 많이 해왔지만 후배 양성이나 에이전트는 장근석에게 좀 낯설어 보인다.

▲고깝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깨 위의 책임감이 무척 크다. 지금껏 받은 사랑을 돌려 드리는 방법 중에는 내가 아는 노하우를 전수하고, 선후배 동료를 챙기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회사 운영에 관심을 안 가졌지만, 이제 30대도 됐고 돈을 좇지 않아도 되니 한류스타로서 큰 사랑을 받은 내가 지금껏 익힌 노하우로 연예계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20대 때는 돈을 벌기 위해 움직였다면 30대부터는 다르게 살고 싶다.

--다시 돈 얘기다. 그동안은 돈을 좇았나.

▲가난했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서 '참 좋은 노래다', 그리고 '내 얘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택시를 운전하셨고 어머니가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셨다. 제천에서 살던 우리 세 식구는 외동아들 교육은 서울에서 시켜야겠다는 어머니의 뜻으로 내가 12세 때 서울로 올라왔다. 20만원 들고 상경했기 때문에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해야했다. 아버지는 양화대교가 아니라 천호대교를 주로 타셨고, 나는 그때 속옷 광고를 찍었다. 세 식구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미친듯이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게 소원이었고 그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삼겹살 들어간 김치찌개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벌어 2년 만에 외가를 벗어나 월세 20만원짜리 우리 집으로 나갔다. 우리 식구는 다시 50만 원을 바라보고, 또 100만 원을 바라보고, 또 200만 원을 바라보며 살았다. 조금씩 돈을 벌어가는 게 행복했다. 하지만 돈은 아무리 벌어도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8개월 살다 돌아왔다. 중학교 3학년 마치고 갔다. 내가 계속 영어 배우고 싶다고, 유학 가고 싶다고 졸랐다. 미국 갈 돈은 없으니 삼촌이 식당을 하시던 뉴질랜드로 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거기서 영어는 안 배우고 일본 친구들하고 어울렸다. 8개월 동안 일본어를 배우고 왔다. 그때부터 일본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으로 진출할 꿈을 키웠다. 금세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MBC '논스톱4' 캐스팅 제안이 와서였다. 역시 돈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에 출연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진짜로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는 한류스타가 됐다.

▲일본 진출 꿈을 키운 지 9년 만에 (꿈의 상징인) 도쿄돔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감개무량했고 목표를 달성해 벅찼다. 그런데 그 이후 생각지도 못한 상실감이 밀려들더라. 그토록 달성하고 싶어 앞만 보고 뛰어왔던 목표를 마침내 달성하고 나니 갑자기 뭘 해야할지 방향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인생 최고의 희열을 맛본 직후 곧바로 인생 최고의 시련을 경험한 셈이다. 많이 힘들었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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