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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인생> 타이거JK "이젠 힙합 아저씨..치유 끝 다시 설렌다"

입력 2014. 09. 29. 07:02 수정 2014. 09. 2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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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 나와 필굿뮤직 설립·부친 별세 겪으며 1년간 공백 11월 새 앨범 계획.."본능적으로 음악만 만들었죠"

소속사 나와 필굿뮤직 설립·부친 별세 겪으며 1년간 공백

11월 새 앨범 계획…"본능적으로 음악만 만들었죠"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래퍼 타이거JK(본명 서정권·40)의 10여 평 남짓 녹음실은 허름했다. 원래 창고였던 공간을 치우고 계란판 같은 방음 벽지를 붙여 이곳에서 음악 작업을 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됐다.

오래된 듯한 컴퓨터, 허름한 소파, 먼지가 앉은 사진…. 비록 겉은 누추했지만 이곳에서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몬스터' 등 대부분의 히트곡이 태어났다. '힙합계의 대부', '맏형'으로 불리는 타이거JK의 음악 공장인 셈이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타이거JK는 "이제 '힙합 아저씨'"라며 "그래도 여기 들어오면 안 늙는 것 같다. 내겐 타임캡슐 같은 곳이다"고 말했다.

그가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건 1년 만이다.

지난해 7월 전 소속사에서 나와 '필굿뮤직'이란 레이블을 설립한 그는 그해 9월 아내인 래퍼 윤미래, 래퍼 비지와 함께 앨범 '살자'를 발표했지만 이후 앨범 공백기를 보내며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녹음실 내 칠판에는 1년 전 '살자' 작업 당시 적어둔 트랙리스트가 그대로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았어요. 여기에만 있으니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되더군요. 비지의 권유로 한 달 전부터 복싱을 시작해 요즘 거기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 큰 산이자 '베프'였던 아버지…"앨범 미루고 아버지 유작 정리"

복싱 체육관에 다니기 전까지 그는 온전한 삶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지난 2월1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자지간의 정은 각별했다. 서울대를 졸업한 부친 고(故) 서병후 씨는 언론인 출신 국내 1호 팝 칼럼니스트로 미국 빌보드에 한국 음악을 소개하는 등 가요계에 업적을 남겼다.

이날도 그는 질문마다 아버지 얘기로 귀결되며 부재의 짙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는 "내게 아버지는 큰 산이자 '베프'(베스트 프렌드)였다"며 "내가 뭘 여쭤도 정보와 조언을 주실 정도로 박학다식한 멘토였다. 지금도 막히면 매일 아버지에게 답을 구하고 싶다. 동네 설렁탕집이든 어딜 가도 아버지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코끝이 찡해졌다.

"2월8일이 아버지 생신인데 달력에 2월1일을 동그라미 쳐두시고 '그날은 생일이 길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를 위해 파티를 열었죠. 함께 사진도 찍고 덕담도 들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서 녹음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기분이 좋아 신나게 녹음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제 팔에서 돌아가셨죠."

아버지가 쓴 투병 일기의 일부도 살짝 꺼내보였다. 항암치료는 받았지만 진통제를 극구 거부했던 부친의 글은 어느 페이지에선 고통 탓인지 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자식을 향한 애틋한 마음, 아내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반지 그림, 떠나는 심경….

결국 그는 앨범 작업을 미루고 아버지가 준비한 8권의 책, 손자 조단을 위해 쓴 동요 노랫말, 한류와 할리우드를 합성해 만들고 있던 '할류' 사이트, 녹음해둔 육성 등 산더미 같은 아버지의 유품과 유작을 정리했다.

계속 발견된 아버지의 글 중 '나무 한 그루 같은 몸을 끌어서라도 한 번 더 좋은 일을 베풀어야 하는데 천벌을 받을 것 같다'는 글귀를 본 그는 산 같던 아버지도 7개월의 투병 생활 동안 두려움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은행에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찾아와 가족, 회사 식구들의 동의를 구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했다.

"홀가분했다"는 그는 "앞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고 써두신 책을 내고 아버지의 아이디어를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 태권도 사범 꿈꾸던 청년, 래퍼의 길로…척수염 등 잇단 난관

타이거JK는 가족이 로스앤젤레스에 이민을 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둘 사이에서 자라는 그에게 '넌 남자가 돼야 한다'며 마이애미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작은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태권도를 배운 덕에 미국 아이들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섞일 수 있었다.

고교 시절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온 그는 태권도 사범이 꿈이었다. 학교에 태권도 클럽도 만들었다. 또 하나 취미가 있었다면 글을 쓰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글로 뭔가를 이뤄내는 걸 동경했다.

이즈음 주위 친구들이 TV와 라디오에는 안 나오는 앨범을 즐겨 듣는 걸 알았다. 랩 가사는 다소 험했지만 현실에서 또래가 쓰는 언어와 말투가 음악이 되는 게 신기했다. 래퍼 비즈 마키, 그룹 N.W.A 등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우리 무리 안의 스타였어요. 스타는 예쁘고 화려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우리와 같은 모자를 쓰고 길거리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죠. 또 욕설만 하는 게 아니라 시 낭송 같은 랩도 했어요."

그는 "친구들이 하우스 파티를 열면 오픈 마이크를 두고 프리스타일로 랩을 했다"며 "처음엔 랩을 하는 게 수줍었는데 친구들의 응원으로 용기를 내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가 한국에 알려진 건 1992년 유명 토크쇼인 '자니윤쇼'에 소개되면서 부터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인종적인 갈등이 심했다. 1992년에는 LA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N.W.A 출신 래퍼 아이스큐브가 한국인을 비하하는 '블랙 코리아'란 노래를 냈다. 이 곡에 분했던 그는 한 힙합 페스티벌에 초대돼 한국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콜 미 타이거'란 곡을 태권도 퍼포먼스와 함께 선보여 상을 받았다.

이 소식에 '자니윤쇼'는 직접 학교를 찾아와 그를 인터뷰했고 한국에는 타이거JK를 좋아하는 소수의 힙합 모임이 생겨났다.

3년 뒤인 1995년 그는 흑인, 백인 친구들과 함께 손수 만든 음악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오아시스레코드가 앨범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첫 앨범 '엔터 더 타이거'다.

그는 "레코드사 사장님이 공장이 있으니 앨범을 내주겠다고 했다"며 "함께 온 미국 친구들은 태권도를 배워 한국 문화를 동경했고, 우탱클랜처럼 동양 문화를 접목하고 싶어해 절에서 함께 사진을 찍어 앨범을 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앨범은 심의에서 '멜로디 없음', '욕설' 등의 이유로 거의 전곡이 금지됐다. 그는 "몇 장을 찍고서는 제대로 오프라인에 출시되지 못했다"며 "방송도 몇 번 했는데 서태지와아이들, 솔리드가 컴백할 때여서 우린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유명 앨범 제작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하나같이 '검둥이, 양키 친구들을 버려라', '그런 음악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니 랩을 써주고 안무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한국에 환상이 깨진 친구들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항간에는 '아버지도 음악 샛길로 빠지더니 아들도 그런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버지에게 죄송했던 그는 "대학 들어가서 학생증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하고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학에 들어가고 태권도를 가르치며 살겠다고 생각했다. UCLA에 합격한 그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브이(V)자를 그리며 학생증 사진을 찍었다.

어느 날 한국의 힙합 동호회의 세미나에 초대됐고 아버지에게 학생증을 보여주고 싶어 1997년 다시 한국으로 왔다. 불과 몇 년 만인데도 한국에선 힙합이 한층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피처링해달라, 가사를 써달라'란 요청이 들어왔고 클럽 등지에서 공연도 했다.

입소문이 나자 엠넷에서 출연 요청을 했고 이 방송을 본 도레미레코드에서 연락이 왔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출시가 제대로 안 된 첫 앨범을 듣더니 "한국말 랩으로 두 곡만 만들어 다시 찍자"고 했다. 친분 있던 김진표에게 한국어 가사 도움을 받았다. 타이틀곡 '난 널 원해'와 아버지가 제목을 붙여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가 나왔다.

그는 미국에서 알던 래퍼 DJ샤인과 함께 '드렁큰타이거'란 팀을 꾸려 1999년 이 곡들을 담은 1집 '이어 오브 더 타이거'를 발표했다.

"출발부터 욕을 먹었어요. 민소매를 입고 활동하고 노래 제목이 반말이라고요. '난 널 원해'의 가사도 한 부분이 야하다고 처음엔 금지됐다가 수정했죠. 18만 장이 팔렸는데 그때로 선 저조한 성적이니 다들 망했다고 했어요. 이후로도 우린 섭외도 잘 안 되고 계속 망한 가수로 불렸죠."

그러나 2001년 3집 타이틀곡 '굿 라이프'가 SBS '인기가요'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1위를 했다고 하자 '너무 좋아하지 마라. 상 받아 기분 좋으면 못 받으면 기분 나쁠 테니까'라고 말씀하시더라"고 기억했다.

2004년 DJ샤인의 탈퇴로 솔로로 활동한 그는 도레미레코드와의 마지막 앨범인 2005년 6집 '1945 해방'부터 그의 음악 색깔을 한층 뚜렷이 드러냈다.

회사와 계약이 종료된 그에게 아버지는 '직접 해보라'며 레이블 설립을 제안했다. 도레미레코드에서 함께 일하던 매니저들과 손잡고 정글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다.

이즈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찾아들었다. 어느 날부터 다리에 감각이 없더니 희소병인 척수염 진단을 받은 것이다. 몸이 퉁퉁 부었고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온갖 치료 끝에 기적처럼 두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이때 큰 힘이 돼준 사람은 연인이던 윤미래였다. 두 사람은 2007년 6월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 3월 아들 조단을 출산했는데 이 사실은 1년이 지나고 알려졌다. 독보적인 남녀 래퍼의 결혼은 힙합 부부의 탄생으로 화제가 됐다.

그는 "사람들은 미래가 강한 줄 알지만 가냘픈 꽃 같은 여자다"며 "눈물이 많지만 힘들어도 절대 짜증 안 내고 늘 중심을 잡아준다. 아버지와는 나보다 더 친했다"고 고마워했다.

조단이 생긴 기운으로 열심히 작업한 2009년 8집 '필 굿 뮤직'은 27트랙을 2CD에 담아 냈다. 이 앨범은 첫 주문량 2만 장을 시작으로 매일 몇 천장씩 주문이 들어오며 오프라인 시장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첫 앨범을 시작으로 올해로 20년차에 접어든 시간을 돌아보며 "난 힙합 문화가 흥미로웠던 완전 초보에서 조금씩 배워간 사람"이라며 "첫 앨범은 명반이 아니었다. 잇달아 앨범 성적이 저조했고 방송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으니 음악이 돈이 되는 거란 생각을 못해 돈 욕심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심 덕에 음악적으로는 계속 다듬어졌다고 설명했다. 긴 스토리텔링이 있는 5집 곡 '편의점', '원스 어폰 어 타임'이 과도기라면 6집에서 음악의 내러티브가 강하게 살아났고 7집부터 꽃을 피운 것 같다고 돌아봤다.

◇ "즐겁게 고생하는 중…밝은 노래 선보일 것"

그는 정글엔터테인먼트를 나오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떠나며 지난 1년간 겪은 복잡한 감정들이 서서히 정리되면서 자신이 만든 레이블이 잘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필굿뮤직에는 타이거JK, 윤미래, 비지, 신인 래퍼 1명 등 가수 넷에 프로듀서 1명, 직원 2명 등 총 7명이 한 식구다. 따로 사무실은 없다.

"영세하지만 저흰 같은 비전을 갖고서 모든 걸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싸워도 재미있게 싸웁니다. 하하. 이 친구들의 꿈을 이루는 게 지금 저의 꿈이고요."

공백기 동안 수많은 곡을 만들어둬 11월께 이 레이블에서 새 앨범을 선보일 예정이다. 아직 타이거JK, 윤미래, 비지 중 누구의 앨범이 될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의 프로젝트 그룹 엠에프비티와이(MFBTY)로 나올 수도 있다.

그는 "누굴 들려주려기 보다 우리가 치유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음악작업이었다"며 "힙합이란 걸 다 잊고 본능적으로 녹음했다. 그러면서 나온 노래들은 결코 슬픈 곡이 아니다. 밝은 노래다"고 말했다.

"미래가 안무도 하겠다고 해요. 하하. 우린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큰 설렘이 생겼습니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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