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기억하라 1997①] 우리들의 맹세, 기억해 줄래?

입력 2012.09.05. 10:17 수정 2012.09.05. 10:1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오마이뉴스 이언혁 기자]

< 응답하라 1997 > 의 주인공들

ⓒ tvN

< 응답하라 1997 > 의 인기가 뜨거운 것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한때이기도,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2030들은 저마다 '성시원' 혹은 '윤윤제'에 빙의해 자신의 학창시절을 되새기고 추억한다.

1998년 12월 5일, 하얀 물결과 노란 물결이 넘실대던 서울 국립극장. H.O.T와 젝스키스를 제치고 제 13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 대상을 받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사랑을 위하여'의 김종환이다. < 오마이스타 > 는 당시 H.O.T와 젝스키스의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이들을 만나 치열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1997년을 떠올려봤다. 이름하여 '기억하라, 1997!'

- 정해익: 1999년까지 SM엔터테인먼트에 몸담으며 H.O.T를 담당했다. 22년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종사한 그는 현재 해피트라이브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또 다른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김기영: 2010년까지 DSP미디어(당시 대성기획)에 몸담으며 젝스키스를 매니지먼트했다. 최근 새 둥지에서 새로운 그룹을 준비하고 있다.

"1998년 골든디스크, 우리가 받을줄 알았는데!"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구수동 기똥차에서 1990년대 후반 H.O.T를 담당했던 정해익씨와 젝스키스를 담당했던 김기영씨(왼쪽부터)가 당시의 흥미진진했던 뒷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 이정민

"1998년이 치열했던 이유는 H.O.T와 젝스키스가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친 해였기 때문이다.(기자 주-H.O.T는 1996년에 데뷔했으며, 젝스키스는 1997년 첫 등장했다.) 젝스키스의 데뷔 앨범이 170~180만 장쯤 팔렸고, H.O.T가 '늑대와 양'으로 150~160만 장을 판매했다. 1998년 골든디스크에서 대상 수상자로 김종환씨의 이름이 불렸고, 모두 깜짝 놀랐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분이 280만 장을 팔았더라. 시상식이 끝난 뒤 모든 수상자가 만나서 단체 촬영을 하는데 젝키, H.O.T 모두 맛이 갔더라." (김기영, 이하 김)

"당연히 H.O.T가 받을 줄 알았는데 음반 판매량이 더 나왔다고 하니까 뭐. < 응답하라 1997 > 에 보면 팬들이 '매니저 000가 회식 장소를 잡아뒀다'면서 대상 수상을 확신하는데 사실 H.O.T는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술집에 간 적이 없다. 토니는 집이 미국이고, 장우혁은 지방이니까 처음부터 나와 셋이 살았는데 당시에는 숙소에서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준비까지 모든 것을 했다. 회식은 주로 이 숙소에서 했고, 시상식 등 특별한 날은 한 호텔 빌라를 잡아 놀았다." (정해익, 이하 정)

1998년 골든디스크 대상을 놓쳤던 H.O.T와 젝스키스는 그해 서울가요대상에서 공동대상을 받았다.

"팬클럽 분포도는 '계란 노른자'였다. 흰자(H.O.T 팬)가 고루 퍼져 있으면 노른자(젝스키스 팬)가 그 사이에 있고. 난 젝스키스에게 '불우한 2인자'라고 했다. 활발히 활동했지만 대상을 받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다음 해에는 핑클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또 넘어가고. 사실 젝스키스가 데뷔하기 전 별명이 '용암'이었다. H.O.T가 '핫'이지 않나. 그것보다 더 뜨겁다고, 더 강한 애들이 나올 거라는 뜻이었다." (김)

넘쳐나는 선물, 팬레터는 어떻게 하나요? "소각하려다가..."

활동 시기가 엇갈렸던 두 팀은 1998년 여름, 맞짱을 떴다. 팬들의 기 싸움도 이때부터 심해졌다. 하얀 우비를 입은 이들과 노란 풍선을 든 이들이 본격적인 '전쟁'을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H.O.T가 잘 되니까 한 명 더 붙여서 나왔다" "비주얼은 젝스키스가 최고다"며 싸웠지만, 두 팀이 맞붙자 시너지 효과도 엄청났다. 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ARS 투표수가 100만 건을 훌쩍 넘었고, 이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방송사는 중복 투표 등에 제동을 걸었다.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 등에 나섰지만 H.O.T와 젝스키스의 기획사는 불황을 겪지 않았다. 멤버들의 사진 한 장에 3~400원씩 하던 시절, 이들은 1주일에 5~6천만 원씩 현금을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MD 상품인 셈이다. H.O.T는 향수와 음료수를, 젝스키스는 로션 등을 내놓기도 했다.

1999년까지 SM엔터테인먼트에 몸담으며 H.O.T를 담당했던 정해익 해피트라이브 엔터테인먼트 대표

ⓒ 이정민

"H.O.T DNA 카드 속의 DNA가 진짜냐고? 진짜 맞다." (정)

"음반 외 부가적인 머천다이징 상품이 처음 시작될 때였는데, 그것을 활성화시킨 것이 H.O.T였다. SM엔터테인먼트는 팬들과 소통을 잘한 축에 속한다. 과거에도 가수와 팬클럽의 연결고리가 있었지만, SM은 회사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SM타운이 사랑받는 노하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벤치마킹해서 따라가는 입장이었고." (김)

"밸런타인데이 때는 초콜릿이, 생일에는 인형이 트럭으로 왔다. 행사가 있는 날이면 용달차가 따라가야만 했다. 매일 들어오는 게 엄청 많은데 다 짊어지고 살 순 없지 않으냐.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가질 것 말고는 평소 교류하는 고아원으로 (선물을) 보냈다. 콘서트 때 고아원 아이들을 초대하기도 했고. 팬레터는 우체국에서 안 가져다준다. 사서함을 개설해서 받아뒀다가 실어가야 한다. 뒤처리는 어떻게 했느냐고? 전 직원이 읽은 뒤 소각했는데 운반하던 중 하나 떨어뜨렸다가 팬들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다." (정)

"김대중 전 대통령 손녀, '내게 맞았다'는데 아뿔싸!"

요즘에야 클릭 한 번만으로 오빠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직캠(캠코더로 직접 찍은 영상)을 통해 평소 모습 또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전화 오면 끊기길 반복했던 PC 통신 시대에는 하루 꼬박 걸려야 동영상 하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었다. 음악 프로그램 현장을 찾아가야 스타를 볼 수 있었고, 숙소 앞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일쑤였다.

SM엔터테인먼트와 대성기획(현 DSP미디어) 사무실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배동 서래마을에 있었던 시절. 문을 닫을 뻔했던 편의점 하나가 팬들 덕분에 높은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00 오빠가 비 오는 날 숙소 앞에 있던 팬을 집까지 데려다 줬다더라" "팬들에게 '집에 가라'며 차비를 줬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숙소 앞에 팬들이 항상 있는데 기분이 좋은 날이면 (숙소 앞에) 가서 '집에 가라'고 1만 원 씩 교통비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말은 정말 안 들었다. 그 돈으로 편의점 가서 라면 사 먹고 또 와서 죽치고 있더라. (웃음)" (정)

2010년까지 DSP미디어(당시 대성기획)에 몸담으며 젝스키스를 매니지먼트했던 김기영 이사

ⓒ 이정민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에 갔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가 사인받고, 사진 찍으며 왔다갔다하더라. 경호팀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어르신 손녀딸'이라고 하더라. 김 전 대통령의 손녀였다. 순간 날 보더니 '할아버지, 저 사람 아는 사람이다'고 하더라. 알고 보니 영화 < 세븐틴 > 이 개봉했을 때, 대한극장에서 저지선이 무너져 내게 맞았던 학생이었다. 순간 대통령과 영부인이 쳐다보는데 어쩔줄 몰랐다." (김)

"방배동은 민원 천국이었다. 아이들 찾는 게 일이었지. 아이들이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지는 게 다반사니까. 방송국 관계자 중에서도 자녀 사진을 주면서 '찾아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가 이러면 우리가 힘들어진다'고 어르고 달래서 보내곤 했다." (정)

====1997년 당시 H.O.T와 젝스키스 매니저를 만나다 관련기사====

포토로 보는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