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빌리티스', 무척 실망스러웠던 이유

듀나 2011. 8. 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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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드라마, 언제까지 시작만 할 것인가

[엔터미디어=듀나의 낙서판] 지난 7일, KBS [드라마 스페셜]에서는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제목의 단막극을 방영했다. 10대, 30대, 50대의 여성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묶은 이 옴니버스물은 방영전후 요란한 반대 열풍에 휩쓸렸다. 지금도 방송국 게시판에 가면 그 흔적이 남아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상관도 없고 십중팔구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증오의 목소리를 터트리는 것을 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처럼 우스꽝스러운 종자들은 없다.

그들에 대해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대신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 과연 어떤 단막극이었는지 들여다보자.

우선 오해 하나. 이 작품은 대한민국에서 방영된 최초의 여성 동성애물은 아니다. 수많은 선례들이 있다. 심지어 [드라마 스페셜]에서도 처음은 아니다. 이미 백진희 주연의 [비밀의 화원]이 지난 시즌에 방영된 적 있다. 툭툭 잘리고 번역이 비틀리긴 했어도 레아 풀의 [안나 트리스테] 같은 작품들이 88올림픽 기념(!)으로 공중파에서 방영된 걸 고려해보면 처음이라고 우기는 건 민망하다. 그것도 모자란다면 지금까지 KBS에서 방영한 독립영화들 중 동성애 영화들만 골라 한 번 세어보라. 결코 모자라지 않다.

하지만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은 분명 튀는 구석이 있다. 동성애 이슈를 반전 속에 묻어 놓고 꼭꼭 숨겼던 [비밀의 화원]과는 달리 이를 전면으로 끄집어낸다. 그리고 제목을 [클럽 빌리티스의 딸]이라고 붙인다! (굉장히 닭살 돋는 제목이라는 사실을 알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이 정도면 전면 선언처럼 보이고, 그런 면에서 신선해보이긴 한다.

하지만 신선함은 딱 여기까지다.

우선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고등학생인 주인공은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면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다. 그러는 동안 주변의 호모포비아가 부각되고, 같은 성향의 친구를 만나고, 작은 파국이 닥친다.

내용 자체는 성실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영화가 그린 파국 중 상당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의 감수성과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는 실망하게 된다. 여전히 이 영화는 10년 전에 나왔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재탕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비밀의 화원] 역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오마주나 다름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10년이나 지났다면 접근법이 조금 바뀌어도 될 것이다. 그 동안 이 나라가 동성애자 청소년들이 보다 수월하게 살만한 곳이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동안 사회 분위기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아마 주인공 주변엔 불법 다운받은 [엘 워드] 전편을 마스터한 친구도 있었을 거고, 걸쭉한 걸그룹 팩픽을 쓰는 친구도 있었을 거다(이런 걸 남자들만 쓴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순진하다). 모든 게 훨씬 복잡해졌다. 다시 말해 2011년에 같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면 변화한 시간과 복잡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 에피소드에는 그런 게 없다. 여전히 [여고괴담]이다. 심지어 [여고괴담 4: 목소리]만 해도 이전 영화들과 태도가 다른데 말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30대 커플이 나온다. 둘 중 한 명이 바람을 피웠고 임신을 했다. 둘은 갈등하고 싸우고 화해한다. 이 에피소드가 그리는 고민 역시 상당 부분은 진짜이고 받아들일 만하다. 30대가 되면 대한민국 비혼 여성들은 주변의 압박과 미래 때문에 고민하기 마련이고 특히 동성애자인 경우 그 고민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역시 익숙한 클리셰가 발목을 잡는다. 이 정도 시놉시스라면 드라마를 안 보신 분들도 금방 눈치 채셨을 텐데, 이 에피소드가 기둥으로 삼은 임신 에피소드는 여성 동성애를 다룬 거의 모든 미국 드라마에서 다루는 것들이다. 그것도 고정 시청자들의 욕을 먹어가면서. 이걸 한국으로 옮긴다고 해서 특별히 신선해지지는 않는다. 백번 들은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은 기분이 들 뿐. (참, 여담이지만, 한고은의, 목소리를 살짝 깐 부치 연기는 정말 귀엽긴 했다. 근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50대 커플을 다룬 세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이었고 실제로 가장 나았다. 아무래도 연령대가 높아지니까 모방할 소스가 부족해지고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여지가 생긴 모양이다. 로맨티시즘을 극복하고 보다 현실적인 눈으로 소재를 보려는 노력도 보이고. 하지만 이 에피소드의 톤도 이전과 비슷하다. 반쯤은 한탄이고 반쯤은 선언.

아무리 생각해도 제작진 스스로가 붙인 '최초'라는 딱지가 발목을 잡는다. 2011년은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최초'로 하기엔 늦은 시기이다. 그리고 그 최초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보완해주지는 않는다. 한 인터넷매체에서는 이 드라마를 '존재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했고, 그건 분명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진짜로 원했던 건 그 이상이 아닐까. 언제까지 시작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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